비번 날 혼자 영화관에 들어가는 일이 요즘 저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됐습니다. 이백 강의를 들으면서 "경험을 글감으로 쌓아라"는 말이 머릿속에 박힌 뒤로, 영화 한 편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피어스〉라는 제목이 눈에 걸린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대만·싱가포르·폴란드 합작, 감독의 장편 데뷔작, 펜싱을 소재로 한 심리 스릴러. 낯선 조합이 오히려 끌렸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탁구 대표로 뛰면서 스포츠가 단순한 체력 싸움이 아니라 심리전이라는 걸 몸으로 배웠던 저로서는, 펜싱이라는 키워드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습니다.좁은 화면 비율이 두 형제의 밀폐된 관계를 고스란히 가두다영화관 의자에 앉자마자 화면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일반 와이드스크린에 익숙해진 눈에 1:66:1이라는 화면 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제가 쓰는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닙니다. 처음엔 저도 영화인 줄 알고 소재를 찾았는데, 알고 보니 제24회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만화 부문 우수상을 받은 일본 만화가 원작이었습니다. KOBIS에 동명의 한국 영화가 등록돼 있긴 하지만 성인 에로티카 장르의 저예산 작품이라 연출이나 메시지를 깊이 파고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원작 만화 사쿠라이 미나 원작, 고히나타 마루코 그림 를 중심으로 한 60대 버스 운전기사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블로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가 쓰는 글이니 너그러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말 한마디 없는 손길이 굳은 어깨를 내려 앉힌다만화는 배우가 없습니다. 연기 대신 선(線)이 감정을 전달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
버스 차고지에서 퇴근 후 휴대폰 화면으로 이 영화를 봤습니다. 작은아들이 중국 웨이하이 살던 시절 PC방에서 바이오하자드 게임을 신나게 하고 돌아와 줄거리를 떠들어대던 그 목소리가 20여 년 만에 문득 떠올라서였습니다. N잡 크루 강의를 들으며 블로그 소재를 찾다가 그 기억이 건드려졌고, 찾아보니 2002년 작 100분짜리 영화가 버티고 있었습니다.기억은 사라져도 몸은 싸우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밀라 요보비치(Milla Jovovich)가 연기한 앨리스는 욕조에서 깨어나는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기억상실증(amnesia)에 걸린 채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인데, 그 눈빛에 공포와 혼란과 본능적 경계심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도 관객은 그녀가 무엇을 느끼는지 압니다. 저는..
버스 동료 기사 한 분이 "형, 이 영화 재밌던데요" 하고 건네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제목만 보고 지나쳤을 겁니다. 수능 귀신에 흑마술이라니, 황당하다 싶었는데 딱 그 황당함이 피곤한 몸을 극장 의자에 붙들어 앉혔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황당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래 남는 영화였습니다.영혼을 걸고서야 1등이 되는 교실이 진짜 귀신이다《교생실습》은 100년 전통의 세영여자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모교에 교생으로 부임한 강은경이 학교 안에 도사린 수상한 기운을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핵심 소재는 흑마술 동아리 쿠로이 소라(黒い ソラ, 검은 하늘)와 400년 넘게 학생들의 영혼을 먹으며 젊음을 유지해 온 일본 사무라이 귀신 이 다이나시(いだいなし, 수고가 헛되다는 의미)..
버스 운전을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납니다. 어느 오후 막차 시간대, 교복 입은 남자애 셋이 뒷자리에 타더니 시끄럽게 떠들다가 결국 다른 승객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저는 안전지대에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봤습니다. "야, 너 내려." 딱 그 말 한마디 했는데, 녀석 눈빛이 묘했습니다. 반항심 반, 그리고 제가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쓸쓸함 반. 집에 돌아와 유튜브를 뒤적이다 우연히 《짱》 예고편이 눈에 걸렸습니다. 1998년 작, 제가 서른셋이던 해 개봉한 영화인데 당시엔 회사 일이 바빠 극장 한 번 못 갔었죠. 그 녀석 얼굴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낙인찍힌 문제아반 교실에서 시작된 이야기황기풍 선생님 이력이 처음 소개될 때 저는 피식 웃었습니다. 고등학교 중퇴, 검정고시..
버스를 몰다 보면 가끔 교복 입은 아이가 올라탑니다. 눈빛이 다릅니다. 멍하다기보다는, 너무 먼 곳을 보고 있는 눈. 백미러로 슬쩍 보면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려 종점에 도착하고도 한참 앉아 있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참에 지인이 《스위트홈 감독판》을 추천했습니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스트리밍으로 틀었다가, 111분 내내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지옥 같은 집 안에 봉인된 방이 있었다영화는 2011년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서 실제로 일어난 '고3 존속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전교 1등 아들 재승에게 전국 1등을 강요하며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엄마 희수. 아들은 성적 위조(성적표를 조작해 실제 점수를 숨기는 행위)라는 비밀을 목숨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