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운전을 하다 보면 명절 직전이 제일 묘합니다.지난 설 연휴 전날 오후, 6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어머니와 40대 아들 둘이 나란히 탔습니다. 두 정거장도 못 가서 작은아들 쪽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형이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해." 어머니가 "조용히 해, 사람들 있잖니" 하고 말렸지만 이미 불씨가 붙은 뒤였습니다. 저는 룸미러로 세 사람을 슬쩍 살피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 어머니, 오늘 명절 며칠이나 버티실까.'그날 이후 줄곧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장면이었는데, 〈직사각형, 삼각형〉을 보면서 그 버스 안 세 사람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운행을 마치고 회사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위에 올라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짧은 예고편이 알고리즘에 걸렸습니다. 45분짜리 중편이라는 소개가 오히려..
퇴근하고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짧은 예고편 하나가 알고리즘에 걸려들었습니다. '손해사정사'라는 단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보험금'이라는 단어가 심장을 살짝 건드렸습니다. 저는 10년 전 사기를 당한 사람이니까요. 예고편 마지막에 "누가 범인인지보다, 왜 사람은 무언가를 믿게 되는가"라는 문장이 화면에 떴을 때 소파에 앉은 채로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날 바로 극장 예매를 했습니다.냉정한 사정사도 무너뜨리는 믿음의 덫중국 MRO 사업을 하던 시절, 저는 한 파트너를 굳게 믿었습니다. 청도 공장 시절부터 10년 넘게 밥도 먹고 술도 마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 사업,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저는 계약서 한 장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관계에서 나온 신뢰였습니다. 그런데 나중..
버스를 몰다 보면 한강 다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건넙니다. 저는 늘 그 물을 잠깐 봅니다. 신호도 아닌데 잠깐 보게 됩니다. 그게 버릇이 됐습니다."데스리버"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물이 먼저 떠올랐습니다.존재하지 않는 영화 앞에서, 존재하는 삶을 마주하다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이번에 이 영화를 찾아보려다가 당황했습니다. 국내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데스리버"라는 제목의 작품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KMDB(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 영화를 봤다거나 기억한다거나 하는 건 거짓말이 됩니다. 60년 넘게 살면서 거짓말은 결국 사람을 더 좁은 데로 몰아넣는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10년 전 사기를 당할 때,..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은 천근만근인데 눈은 말똥말똥한 날이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며칠 전부터 "아버지, OTT에 올라왔으니까 한번 보세요" 하고 권하던 영화가 있었는데, 그런 새벽에 거실 소파에 혼자 앉아서 틀었습니다. 멜 깁슨이라는 이름은 알지만 요즘 그 배우 영화를 찾아볼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첫 장면부터 뭔가 가슴에 걸렸습니다. 이게 단순한 액션영화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요.숲 속 오두막에서 - 보드리라는 인물이 마음에 걸린 이유영화 〈헌팅시즌(Hunting Season, 2025)〉은 문명과 거리를 둔 채 숲 속 오두막에서 딸과 단둘이 살아가는 남자 보드리(멜 깁슨 분)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사냥과 낚시, 자급자족으로 하루를 꾸리는 삶. 외부 세계와 철저히 선을..
처음 '좀비딸'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는 코미디 영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줄거리를 읽는 순간 이 영화가 단순한 좀비물이 아니라 가족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호랑이 사육사도 못 버린 아버지의 본능조정석이 연기한 이정환은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인물입니다. 맹수 전문 사육사라는 직업 설정이 처음엔 코미디 장치로만 보였는데, 화면을 따라가다 보니 그 설정이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된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조정석의 연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딸 수아 앞에서의 눈빛 변화입니다. 좀비가 된 딸을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 공포·슬픔·사랑 세 가지 감정이 한 눈빛 안에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내 딸이 맞는가"라는 의심과 "그래도 내 딸이다"라는 확신이 한 프레임에 공존했고, 저..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사흘쯤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감상을 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버스 핸들을 잡고 있는데도, 신호 대기 중에도 자꾸 하민의 표정이 떠올랐거든요. 엄마를 지키기 위해 엄마에게 등을 돌려야 하는 아들. 그 역설(逆說: 겉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진실이 담긴 논리)이 104분 내내 제 가슴 안에서 무게를 키워갔습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극장에 들어간 건 최우식 배우 때문이었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다 보면 젊은 승객들이 핸드폰 화면으로 드라마나 영상을 보며 낄낄대는 경우가 많은데, 그 화면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배우더라고요. 도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저렇게들 빠져드나 싶어서 호기심 반, 반신반의 반으로 들어갔다가 완전히 붙잡혀 버렸습니다.사랑하기 때문에 멀어져야 하는 역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