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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시즌]숲 속 오두막에서 되찾은 인간의 온도 , 멜깁슨의 눈빛, 문

by 어성초님 2026. 6. 19.

헌팅시즌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은 천근만근인데 눈은 말똥말똥한 날이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며칠 전부터 "아버지, OTT에 올라왔으니까 한번 보세요" 하고 권하던 영화가 있었는데, 그런 새벽에 거실 소파에 혼자 앉아서 틀었습니다. 멜 깁슨이라는 이름은 알지만 요즘 그 배우 영화를 찾아볼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첫 장면부터 뭔가 가슴에 걸렸습니다. 이게 단순한 액션영화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요.

숲 속 오두막에서  - 보드리라는 인물이 마음에 걸린 이유

영화 〈헌팅시즌(Hunting Season, 2025)〉은 문명과 거리를 둔 채 숲 속 오두막에서 딸과 단둘이 살아가는 남자 보드리(멜 깁슨 분)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사냥과 낚시, 자급자족으로 하루를 꾸리는 삶. 외부 세계와 철저히 선을 긋고, 타인의 일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 하나로 버텨온 사람입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랬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2013년 중국에서 귀국하고 사기 피해를 당한 뒤 한동안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습니다. 전화도 안 받고, 아는 얼굴 마주치는 것도 꺼려지고. 20년 가까이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니까 세상 전체가 적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나를 보호하려면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버드리의 그 '불개입 원칙'이, 그 시절 제 마음의 방어기제(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세우는 심리적 장벽)와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 태그가 강가에서 총상을 입은 채 쓰러진 젊은 여성 제뉴어리를 데려옵니다. 봐드리는 본능적으로 외면하려 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르는 사람의 위험을 집 안으로 들이는 건 원칙을 깨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결국 그는 문을 엽니다. 자식이라는 존재가 부모가 닫으려는 문 옆에 슬그머니 창문을 열어두는 것 같다는 생각을 그 장면에서 했습니다. 저희 큰아이가 경찰이 됐을 때도,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내내 말없이 옆에 있어줬거든요. 그 장면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후 제뉴어리를 쫓아온 무장한 조직과의 대치로 이어지며,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의 문법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한 생존 액션으로 분류하기엔 아까운 이유가 있습니다. 보들이 가 총을 들기 전에 이미 훨씬 더 어려운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두려움과 싸워서요.

멜 깁슨의 눈빛이 말하는 것들 - 배우와 연출이 만든 장면들

저는 버스를 몰면서 날마다 수백 명의 얼굴을 봅니다. 아침 첫차에 오르는 눈빛, 퇴근길 지친 어깨,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는 표정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볼 때도 배우의 눈을 먼저 보게 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헌팅시즌〉 내내 저는 멜 깁슨의 눈을 쫓았습니다.

봐드리는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침묵이 연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이 인물의 삶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부상당한 제뉴어리를 처음 발견하는 장면에서 버드리의 눈빛은 단 0.5초 사이에 세 가지 감정을 거칩니다. 위험을 감지하는 경계심, 외면하고 싶은 자기 보호 본능,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인간적 연민. 대사 한 줄 없이 그 세 가지를 눈빛으로 표현해 내는 것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입니다. 20대 배우가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연기라고 느꼈습니다.

몸짓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봐드리는 절대 서두르지 않습니다. 문을 여는 동작 하나, 총을 드는 자세 하나에도 오랜 세월 숲에서 단련된 사람의 절제가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딸 태그와 함께하는 장면에서만큼은 그 단단한 몸짓이 살짝 풀립니다. 딸의 눈을 마주 볼 때 어깨가 1~2센티미터 내려앉는 그 미세한 변화가 저는 가장 좋았습니다. 아버지라면 다 압니다. 자식 앞에서 무너지는 그 순간을요.

태그 역을 맡은 소피아 후 블리츠는 아버지의 단단한 원칙에 균열을 내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연기에서 주목할 점은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울부짖거나 애원하지 않습니다. 조용한 눈빛과 표정만으로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그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가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 방식) 속에서 두 배우의 호흡은 말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전달했습니다.

RJ 콜린스 감독의 연출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공간의 활용입니다. 숲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내러티브 공간(narrative space, 이야기의 흐름과 감정을 함께 담아내는 배경)으로 기능합니다. 보들이 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 카메라는 넓게 열리고, 위협이 가까워질수록 앵글이 조여들고 나무들이 화면 가장자리를 빽빽하게 채웁니다. 이 클로즈업(close-up, 인물이나 사물을 가까이 찍어 감정을 강조하는 촬영 기법)과 롱샷의 교차는 관객을 버드리의 불안 속으로 끌어들이는 장치로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음악도 과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안데르스 니스카와 클래스 발이 담당한 스코어(score, 영화의 분위기와 감정을 강화하기 위해 작곡된 배경음악)는 긴장 장면에서도 결코 귀를 압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묵에 가까운 음악이 긴장감을 더 깊이 쌓아 올립니다. 버스를 몰다 보면 차 안이 조용할 때 사람들의 표정이 더 선명하게 보이거든요. 그것과 비슷한 효과라고 느꼈습니다.

이 영화가 저에게 남긴 것 - 문을 다시 열기로 한 사람의 이야기

중국에서15년을 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현지 거래처 직원이 다쳐서 병원에 데려갔을 때, 처음 한순간은 '내 일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사람이 고통받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게 또 사람이더라고요. 보드라도 결국 그걸 이긴 겁니다. 원칙이 아니라 인간이 이긴 거지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질문은 이겁니다. 우리는 언제 닫혔던 문을 다시 열기로 결심하는가? 봐드리는 딸 때문에 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두 아들 때문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쿠팡 알바부터 시작해서, 배민 배달하고, 버스 핸들 잡고, 보험 설계도 하면서요. 하나님이 제 등을 밀어주신 것도 있고, 가족이 창문을 열어둔 것도 있습니다.

2025년 12월 21일, 저는 금연을 시작했습니다. 담배 하나 끊는 게 뭐 대수냐 싶겠지만, 저한테는 또 하나의 문을 여는 일이었습니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핸들을 잡고 싶은 마음이요. 보들이 가 숲 속에서 총을 든 것도 결국 딸과 함께 더 살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가 그를 움직인 겁니다. 그 차이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 예술 작품을 통해 억압된 감정이 해소되며 정화되는 심리적 경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걸 느꼈습니다. 새벽 거실 소파에서 혼자 봤는데, 끝나고 나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뭔가 가슴에서 풀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 영화는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는 분보다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한 번쯤 문을 닫아본 적 있는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40~60대 남성, 가족을 위해 버티고 또 버텨온 분들이라면 버드리의 어깨가 내려앉는 그 장면에서 뭔가를 느끼실 겁니다. 거창한 메시지 없이, 조용히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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