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저녁, 유튜브 알고리즘이 무심하게 내민 예고편 하나가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예순이 넘은 버스 기사가 팝스타 영화를 보러 극장까지 간다는 게 처음엔 스스로도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이클이 아버지 조지프의 눈빛 앞에서 온몸을 떨며 노래하는 그 짧은 장면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스포트라이트가 숨길 수 없었던 소년의 두 얼굴앤트완 퓨콰 감독은 《트레이닝 데이》(2001)에서도 그랬듯 인간 내면의 명암을 조명 하나로 설명하는 감독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 솜씨는 한층 더 정교해졌습니다.무대 장면에서는 스포트라이트(집중 조명)가 마이클 한 명을 태울 듯 강렬하게 쏟아지고, 나머지 공간은 완전한 어둠 속에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아버지..
새벽 첫 차를 몰고 나올 때면 서울 거리는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신호등만 혼자 깜빡이는 텅 빈 도로를 달리다 보면 묘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의 전부일까?' 그 물음을 오래 품고 있던 차에 〈디스클로저 데이〉를 만났습니다. 스필버그라는 이름 세 글자가 예매 버튼을 누르게 했습니다. 저는 1982년 열일곱 살에 〈E.T.〉를 보고 극장 안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던 세대입니다. 그 감독이 40년도 더 지나 다시 외계인을 들고 나왔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훈련된 미소가 균열을 일으키던 순간, 블런트의 눈빛이 말했다에밀리 블런트가 연기한 기상캐스터 마거릿은 이 영화에서 가장 정교한 신체 언어(바디 랭귀지, body language — 말 대신 몸과 표정으로 감정을 ..
서울 시내버스를 몰다 보면 매일 아침 이런 감각이 찾아옵니다. 핸들을 잡은 순간, 이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무게가 제 두 손으로 흘러들어 오는 느낌. 50명 가까운 승객을 태우고 도심을 가르는 그 감각이 몸에 배어 있어서인지, 저는 조종간 하나에 수십 명의 목숨이 걸린 장면을 보면 남들보다 조금 다른 자리에서 화면을 바라보게 됩니다.〈하이재킹〉을 보게 된 건 늦은 오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배우자가 TV 앞에 앉아 "이거 같이 봐요"라고 했고, 피곤한 몸을 소파에 뉘었는데 첫 장면부터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1971년 겨울, 속초에서 김포로 향하던 작은 여객기 안에서 폭탄이 터지는 그 순간. 2024년 개봉작이지만 저에게는 실화의 무게가 먼저 가슴을 눌렀습니다.핸들을 놓지 못하는 손 부..
야간 버스 운행을 마치고 귀가한 날 밤이었습니다.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어 소파에 등을 기댄 순간, 아내가 보고 있던 화면에서 두 여자가 날카로운 눈빛을 맞부딪히고 있었습니다. "쌍둥이 언니가 억울하게 죽었어. 그 동생이 언니 이름으로 살면서 복수하는 거야." 그 한 마디에 저는 등을 곧추세웠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면서까지 복수를 택한 여자 — 그 설정이 도무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이름을 지워야만 시작되는 복수의 무게드라마 《붉은 진주》의 핵심 설정은 '신분 교체(Identity Substitution)'입니다. 김단희는 쌍둥이 언니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아델 바이오 사장 자리까지 오릅니다. 백진주는 '클로이 리'라는 전혀 다른 인격을 창조해 재벌 심장부에 침투합니다. 두 여자가 공유하는..
버스 종점에서 숨을 고르는 그 짧은 시간, 저는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봅니다. 그날은 알고리즘이 「대가족」 예고편을 밀어 넣었습니다. 60년 만두집 아버지와 스님이 된 아들. 양우석 감독의 이름을 보고 망설임 없이 극장을 예약했습니다. 「변호인」을 만든 사람이 만두 가게 이야기를 찍었다면, 그 안에 분명 만두보다 묵직한 것이 들어있을 거라 짐작했기 때문입니다.60년 만두집 아버지의 침묵한 부정(父情)이 말하는 것들김윤석이 연기한 함무옥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들이 스님이 됐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에서 그는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 주변 근육만 미세하게 파르르 떨립니다. 소리치는 것보다 참는 얼굴이 더 아프다는 것을 김윤석은 온몸으로 증명합..
버스 운전을 하다 보면 거울 속 얼굴들이 책 보다 많은 걸 가르쳐 줍니다. 어느 날 종점에서 한숨을 삼키던 중년 신사,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교복 차림의 학생. 저는 운전대를 잡으면서 늘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전쟁 중일까. 영화 〈나폴레옹〉을 보고 난 뒤, 그 생각이 더 깊어졌습니다. 유럽 대륙을 손에 쥔 황제도 결국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니까요.결핍의 눈빛으로 유럽을 호령한 황제의 두 얼굴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나폴레옹은 제가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영웅의 위엄보다 결핍의 냄새가 먼저 났습니다. 피닉스는 나폴레옹의 눈빛을 시종일관 불안하게 유지합니다. 전장에서 말을 타고 호령할 때조차 그 눈 안에는 어딘가 인정받지 못한 아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