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백미러로 잠깐 본 장면이 있습니다. 앞자리 젊은 여성이 스마트폰을 얼굴에 바짝 대고 쌍꺼풀 필터, 콧대 필터, 피부 밝기 필터를 씌웠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마음이 쓰렸고, 그 생각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 〈금발이 되고 싶어〉를 보게 됐습니다.거울 앞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나와 조앤의 눈빛중국계 미국인 소녀 조앤 황은 프롬 퀸이 되고 싶어서, 더 정확히는 또래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어서 인종을 바꾸는 수술을 선택합니다. SNS 필터 앱 '에트노스(Ethnos)'를 통해 백인 외모를 경험한 뒤, 실제 수술로 그 얼굴을 얻으려 하는 이야기입니다. 장르상으로는 다크 코미디와 바디 호러(신체 변형 공포)의 혼합이지만, 저에게는 15년간의 중국 생활이 내내 겹쳐 보였습니다...
2003년 겨울, 저는 중국 웨이하이의 작은 아파트 거실에서 노트북 화면으로 이 영화를 처음 봤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산동성으로 건너간 지 막 1년이 채 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은 동료 주재원의 입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영화가 끝났을 때 저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두 아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아내는 뜨개질을 하다 말고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뭔가 목덜미를 세게 붙잡힌 느낌, 그게 〈실미도〉였습니다.국가에 버려진 사람들, 안성기와 설경구의 눈빛이 말한 것안성기가 연기한 최재헌 준위의 눈빛은 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언어입니다. "김일성 목을 따 오라"는 명령을 전달하는 순간에도, 부하들이 훈련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바라볼 때도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습..
버스 운행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해운대》 후반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2019년 무렵이었습니다. 중국 15년을 접고 MRO 사업도 실패로 끝난 뒤였고, 사기 피해로 통장은 바닥이었습니다. 리모컨을 내려놓은 것은 설경구가 파도 속에서도 연희의 손을 놓지 않으려던 그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손을 잡는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래도 손을 놓지 않는 그 마음. 그날 밤 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죄책감을 넘어선 사랑설경구 씨가 연기한 최만식은 겉으로는 해운대 상가번영회를 자처하는 허풍쟁이 백수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연희 아버지를 2004년 인도양 쓰나미에서 잃었다는 죄책감이 10년 넘게 곪아 있습니다. 설경구 씨의 탁월함은 그 죄책감을 단 한 마디 대..
2013년 12월 그 영화가 극장가를 휩쓸 때, 저는 중국 산동성에서 MRO 부품 재고표를 들여다보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습니다. 관객 1,137만 명을 기록하며 한국 사회를 뒤흔든 영화를(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링크) 올해 처음 봤습니다. 60 넘은 버스기사가 이어폰 끼고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두 번이나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습니다. 눈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가슴이 너무 무겁게 내려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국밥집 아주머니의 눈물이 잠든 양심을 깨웠다영화에서 제 마음을 가장 먼저 건드린 건 송우석이 아니라 국밥집 아주머니 최순애였습니다. 김영애 선생님이 연기한 그 인물, 아들 진우가 끌려간 뒤 허름한 국밥집을 혼자 지키며 변호사 문을 두드리는 장면. "제 아들은 책을 읽었을 ..
2015년 초, 중국 산동성에서 MRO 사업을 벌이던 저는 한국 출장길에 혼자 극장 문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가족도, 아는 사람도 없이, 지친 몸 하나만 이끌고 들어간 어두운 극장에서 저는 두 시간 내내 입을 틀어막고 울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뺨이 젖어 있었고, 그 이유를 한참 동안 말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스크린 속 덕수의 삶이 어딘가는 제 아버지의 이야기였고, 또 어딘가는 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황정민이 억누른 눈물로 완성한 '짐을 진 남자'의 연기황정민의 연기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억누름'입니다.덕수는 웁니다. 하지만 절대 남 앞에서 먼저 무너지지 않습니다. 황정민은 그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듯 표현합니다. 독일 광산 사고 장면에서 동료 달구가 ..
버스 차고지에서 동료 기사 한 분이 "필리핀 배경 한국 영화가 꽤 볼 만하다"라고 귀띔해 주셨을 때, 저는 바로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중국에서 15년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낯선 땅에서 혼자 버텨야 하는 이야기는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 길로 퇴근 후 영화관에 들렀습니다.태권도 꿈을 접은 도준이 48시간 안에 엄마를 구하러 뛰어든다영화 납치 48시간 (The Guardian, 2026)은 필리핀 마닐라를 배경으로 한 범죄 액션 영화입니다. 감독 정장환, 주연 남우현·박은혜·한재석, 상영 시간 90분, 15세 이상 관람가. 배급사 ㈜누리픽쳐스가 2026년 6월 17일 개봉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링크)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질문이 묵직합니다. 필리핀에서 성공한 사업가 미진(박은혜)이 한인 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