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스물두 살의 저는 퇴근 후 동료들과 허름한 극장 의자에 앉아 팝콘도 없이 이 영화를 봤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영화가 30년이 훌쩍 넘어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의 저에게 다시 이렇게 말을 걸어올 줄은.안성기의 소심한 눈빛이 전한 체념과 경외의 사랑법안성기가 연기한 영민은 제가 지금껏 스크린에서 본 가장 조용한 사랑꾼이었습니다. 그는 소리치지 않습니다.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그저 공연장 객석 한편에서 혜린을 바라볼 뿐이지요. 안성기는 그 눈빛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짝사랑하는 사람 특유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듯한 반쯤 체념한 시선. 익명으로 꽃을 보내고 앨범을 건네면서도 정작 본인은 한 발짝 뒤에 물러서 있는 영민의 몸짓은 소심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경외..
지난해 여름, 비번 날 오후였습니다. 딱히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CGV 앞을 지나다 포스터 하나가 발걸음을 붙들었습니다. 군복 차림의 이제훈이 철책 쪽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94분 내내 손에 힘을 쥐고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나오면서 저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단순한 탈북 액션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철책을 넘기 위해 달린 이제훈의 눈빛과 몸짓이 말하는 것이제훈이 연기한 규남은 말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옵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을 체제 안에 갇혀 살면서도 단 한 번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의 눈빛, 그것은 체념과 의지가 기묘하게 뒤섞인 빛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이제훈은 특유의 절제된 연기(미니..
버스를 차고지에 세우고 내리던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동료 기사 한 분이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보며 씩 웃고 있길래 뭘 보시냐고 물었더니, "릴로 & 스티치 실사판 나왔대요, 어릴 때 애들이 엄청 좋아했는데" 하시는 겁니다. 그 말 한마디가 가슴 한편을 건드렸습니다. 저도 기억이 났거든요. 2002년, 중국 산동성 청도에 처음 주재원으로 나간 그해, 두 아들이 DVD로 릴로 & 스티치를 얼마나 반복해서 봤는지 모릅니다. 낯선 땅 로컬학교에 적응해야 했던 두 아이들에게 그 파란 괴물은 어떤 위안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쉬는 날 혼자 극장에 들어갔습니다.부모 없이 버텨온 아이의 눈빛이 스티치를 가족으로 만들었다릴로 역의 마이아 케알로하는 영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밀도의 감정 표현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지난 6월 쉬는 날 아침, 혼자 극장을 찾았습니다. 아내는 요양보호사 시험 준비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저는 큰 기대 없이 《슈퍼맨》을 선택했습니다. 2013년 《맨 오브 스틸》의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번 슈퍼맨은 제가 기억하던 영웅과는 전혀 달랐습니다.흔들리는 눈빛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증명한 순간데이비드 코런스웻이 연기한 클라크 켄트는 이전 슈퍼맨 배우들과 결이 다릅니다. 헨리 카빌이 '신에 가까운 완벽함'을 표현했다면, 코런스웻은 '상처받은 인간성'을 먼저 내보입니다. 렉스 루터에게 감금당하는 장면에서 그의 눈빛은 분노가 아닙니다. 혼란과 슬픔, 그리고 흔들리지 않으려 버티는 사람의 눈빛입니다. ..
퇴근 후 동료 기사가 "중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너자 2》는 꼭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극장을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중국 애니메이션이라는 호기심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는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눈빛 하나로 분노와 두려움을 동시에 터뜨린 악동의 연기애니메이션이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실사 배우를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쟈오쯔 감독이 노자의 눈빛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화면을 통해서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반항기 가득한 눈꼬리, 그 안에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흘러넘치는 장면들은 말 그대로 관객을 압도합니다.특히 천계의 위선을 마주하는 순간, 노자의 눈빛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깊은 상처와 배신감이 얹혀 있었습니다. 미간의..
영화 《호프》는 나홍진 감독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SF 미스터리 영화입니다.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의 연기와 함께 인간의 두려움과 미지의 존재를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실제 경험을 더해 리뷰했습니다.버스 차고지에서 핸드폰으로 예고편을 눌렀던 그 순간부터 저는 이 영화를 기다렸습니다. 나홍진이라는 이름이 제게 단순한 감독명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0년 전, 중국 웨이하이 숙소 근처 극장에서 혼자 《곡성》을 보던 날부터였습니다. 영화 《호프》는 나홍진 감독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SF 미스터리 영화입니다.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이 출연하며 미지의 존재와 인간의 공포를 독창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호프 줄거리는 DMZ 인근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의문의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두려움과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