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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 차고지에서 핸드폰으로 예고편을 눌렀던 그 순간부터 저는 이 영화를 기다렸습니다. 나홍진이라는 이름이 제게 단순한 감독명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0년 전, 중국 웨이하이 숙소 근처 극장에서 혼자 《곡성》을 보던 날부터였습니다. 《호프》는 그 감독이 10년의 침묵 끝에 내놓은 장편이고, 저는 그 무게를 충분히 느끼며 극장 의자에 앉았습니다.

    10년의 침묵 끝에 마을 어귀에 선 것들

    나홍진 감독을 처음 제대로 각인한 것은 《곡성》이었습니다. 2016년, 중국 MRO 사업이 막 기울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거래처 대금이 묶이고, 믿었던 파트너가 연락을 끊던 그 무렵, 저는 웨이하이 숙소 근처 작은 극장에서 혼자 그 영화를 봤습니다. 화면 속 마을에 정체 모를 존재가 스며들고 사람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보며 묘하게 그 시절 제 현실과 겹쳐 읽었습니다.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끝까지 알 수 없는 그 존재처럼, 사업 파트너가 그랬고 상황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나홍진이라는 이름은 제게 일종의 시대적 감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감독이 10년 만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히려 기대보다 긴장이 먼저 왔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오래 기다린 것이 기대를 배신했던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그 경험이 꽤 많아서, 잔뜩 부풀었다가 무너지는 실망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프》는 달랐습니다.

    1970~80년대 DMZ와 맞닿은 외딴 마을 호포항. 이 공간 설정(로케이션 설계)이 이미 나홍진 감독의 의도를 절반쯤 담고 있습니다. 분단이라는 현실과 미지의 존재라는 SF 장치를 한 공간에 겹쳐놓은 것입니다. 철책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그 시대의 공포와, 숲 바깥에서 목격된 외계적 존재의 공포가 서로를 증폭시킵니다. 이것을 공간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 모든 시각 요소를 배치하는 연출 방식)의 관점에서 보면, 감독은 한국인이라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분단의 공포 위에 SF라는 새 층을 얹은 것입니다.

    저는 경북 시골 마을 출신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담배밭이랑을 걸었고, 벼 베는 날 온 식구가 허리를 굽혔습니다. 화면 속 호포항 마을 사람들이 숲 가장자리를 경계하며 일상을 이어가는 모습이, 어릴 적 어른들이 산 너머를 함부로 가지 말라고 이르던 그 분위기와 닮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어른들의 눈빛이 이미 말하고 있었지요. 무언가 있다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감각을 나홍진 감독은 정확하게 포착해서 스크린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예전이라면 저는 이 영화를 "왜 하필 SF냐"는 시각으로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봅니다. SF라는 장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상처와 불안을 가장 정직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 이름 붙일 수 없는 두려움, 그리고 그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것은 70년대 시골 마을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야생의 눈빛이 미지의 존재 앞에서 말하는 것

    황정민이라는 배우를 생각하면 저는 늘 같은 질문을 합니다. 저 눈빛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호프》에서 그가 맡은 범석은 DMZ 인근 마을의 출장소장입니다. 화려한 직책도 아니고 영웅적 배경도 없는 평범한 중년 남자입니다. 그런 인물이 미지의 존재 앞에 섰을 때 어떤 얼굴을 짓는가, 그것이 황정민 연기의 핵심이라고 저는 봅니다.

    황정민은 공포를 표현할 때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좁히고 입술 끝을 미세하게 떱니다. 그 절제된 떨림이 보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데, 이것을 감정 억제 연기(internal acting, 감정을 밖으로 폭발시키지 않고 내부에서 눌러 표현하는 방식)라고 합니다. 저는 버스를 몰다 보면 가끔 진짜 무서운 상황이 생깁니다. 취객이 갑자기 운전석으로 달려들거나, 빗길에 차가 미끄러질 것 같은 순간에 저는 소리를 지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몸이 굳으면서 눈만 크게 뜨이는 그 감각, 황정민의 연기에서 그 본능적 정직함이 느껴졌습니다.

    범석이 마을 어귀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목격 지점을 표시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손놀림이 1984년 대기업에서 생산관리를 하던 시절 라인 이상 구역을 파악하던 선배들의 손과 겹쳐 보였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앞에서도 일단 기록하고 파악하려는 그 자세. 그것이 어쩌면 평범한 사람이 공포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대응인지도 모릅니다.

    조인성의 연기는 대조적입니다. 몸 전체가 언어입니다. 숲을 걷는 방식, 총을 쥐는 손의 각도, 위험을 감지했을 때 고개를 꺾는 습관, 이 모든 것이 "나는 자연 속에서 자란 야생의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신체 언어 연기(physical language acting, 대사 없이 몸짓과 자세로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라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순간이 있으신지요. 그 순간의 솔직함을 조인성은 카메라 앞에서 구현해 냅니다.

    정호연은 표정보다 호흡으로 감정을 전달합니다.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히려 더 조용해지는 배우입니다. 그 고요함이 역설적으로 폭발 직전의 긴장감을 만드는 것이 인터컷 편집(intercut, 두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며 긴장을 높이는 편집 기법)과 맞물렸을 때 효과가 배가됩니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모션 캡처와 페이셜 캡처(facial capture, 배우의 얼굴 근육 미세 움직임을 디지털로 기록해 CG 캐릭터에 입히는 기술)로 외계 존재를 구현했습니다. 실제 부부가 스크린 안에서 외계 생명체로 만난다는 설정 자체가 기묘한 감정선을 만드는데, CG 너머로 인간적인 따스함이 새어 나오는 그 순간들이 이 영화를 단순한 SF 이상으로 끌어올립니다. 당신이라면, 외계의 얼굴을 한 존재의 눈빛에서 인간을 느낀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외계와 인간이 맞닿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질문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선악의 경계를 지우는 것"입니다. 《추격자》에서 관객은 범인을 일찍 알면서도 무력감을 느끼고, 《곡성》에서는 끝까지 누가 악인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호프》에서 나홍진 감독은 그 질문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외계 존재는 과연 적인가, 아니면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적으로 규정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제게 개인적으로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10년 전 중국에서 사업이 무너질 때, 주변의 시선이 있었습니다. 일부는 제가 순진해서 당했다고 했고, 일부는 애초에 무리한 욕심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 시선들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두려움의 정체는 상대방이 아니라 제 안의 불확실성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인간은 원인을 만들어내야 안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호포항 마을 사람들이 미지의 존재를 보며 취하는 반응들이 정확하게 그 심리를 해부합니다.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에서 시대 고증(historical accuracy, 특정 시대의 생활상·의복·소품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작업)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70~80년대 농촌 마을의 소품 하나, 조명의 색온도 하나가 그 시대의 공기를 재현합니다.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았던 저에게 그 디테일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억을 촉발하는 장치였습니다. 어린 시절 마을 어귀에 있던 공중전화, 리어카에 싣던 곡식 자루, 저녁이면 사방에 퍼지던 연탄 냄새. 그런 것들이 화면 안에 있었습니다.

    칸 영화제 경쟁부문(Competition, 황금종려상을 겨루는 칸 영화제의 최상위 섹션) 초청이라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이 칸의 부름을 받은 적은 있어도 경쟁부문 초청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한국 관객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미지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행동이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차고지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혼자 생각했습니다. 버스 창밖을 스치는 서울 풍경을 보면서,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호포항 마을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되지 않는 것들, 이름 붙일 수 없는 두려움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독자 여러분은 지금 삶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주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나홍진 감독이 10년 만에 던진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 머뭅니다. 극장을 나온 뒤에도, 밥을 먹는 동안에도, 잠들기 전에도 그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것이 좋은 영화의 조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내면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 《호프》는 그 조건을 충족하는 영화입니다.

    황정민의 절제된 눈빛, 조인성의 야생적 신체 언어, 정호연의 고요한 호흡, 그리고 패스벤더와 비칸데르가 CG 너머로 전달하는 인간적 온기까지. 이 모든 것이 나홍진 감독의 손 안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우리는 낯선 것 앞에서 어떤 인간인가.

    60대 초반 버스 기사가 평일 낮에 혼자 팝콘도 사지 않고 앉아 본 영화치고는, 꽤 많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 영화는 SF를 좋아하는 분께도, 한국 영화의 깊이를 원하는 분께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온 분들께도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