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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로 & 스티치

    버스를 차고지에 세우고 내리던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동료 기사 한 분이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보며 씩 웃고 있길래 뭘 보시냐고 물었더니, "릴로 & 스티치 실사판 나왔대요, 어릴 때 애들이 엄청 좋아했는데" 하시는 겁니다. 그 말 한마디가 가슴 한편을 건드렸습니다. 저도 기억이 났거든요. 2002년, 중국 산동성 청도에 처음 주재원으로 나간 그해, 두 아들이 DVD로 릴로 & 스티치를 얼마나 반복해서 봤는지 모릅니다. 낯선 땅 로컬학교에 적응해야 했던 두 아이들에게 그 파란 괴물은 어떤 위안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쉬는 날 혼자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부모 없이 버텨온 아이의 눈빛이 스티치를 가족으로 만들었다

    릴로 역의 마이아 케알로하는 영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밀도의 감정 표현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문 것은 화려한 CG도 하와이의 풍경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릴로의 눈빛이었습니다.

    릴로는 쉽게 슬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나이 아이치고는 지나치게 의젓하고, 때로는 엉뚱하리만큼 당당합니다. 그 의젓함 뒤에 감춰진 결핍을 케알로하는 대사가 아니라 눈빛 하나로 전달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거부당하는 장면에서 입술은 꾹 다물고 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립니다. 어른처럼 꿋꿋하게 버티려는 아이의 그 흔들림이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것을 영화 용어로 이모셔널 서브텍스트(emotional subtext, 대사 없이 감정을 전달하는 내면 연기)라 하는데, 데뷔작에서 이 수준을 보여주는 아역은 흔치 않습니다.

    나니 역의 시드니 엘리자베스 아구동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집을 방문할 때 서류를 감추면서도 태연한 척 웃어 보이는 몸짓, 릴로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욕실 문을 닫고서야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장면. 그 모든 몸짓이 혼자 다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무게를 담아냈습니다. 대사 한마디 없이도 죄책감과 애정과 피로가 동시에 읽혔습니다.

    당신은 혹시 어른인 척 버텨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2004년 청도에서 큰아들이 밥을 먹다가 말없이 눈물을 뚝 흘리던 날을 떠올렸습니다. "친구가 없어서요." 그 한마디를 들은 뒤 해줄 말이 없어서 그냥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아빠도 여기서 배우는 중이다"라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릴로의 눈빛은 그날 밤 아들의 눈빛과 겹쳐 보였습니다.

    스티치는 CG 캐릭터(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가상 존재) 임에도 표정 연기가 탁월했습니다. 처음엔 눈에 경계심이 가득하고 몸이 항상 긴장 상태로 웅크려 있습니다. 누군가 손을 뻗으면 반사적으로 물러서는 그 몸짓이 단순한 외계 생물의 행동이 아니라, 한 번도 사랑받아본 적 없는 존재의 본능적 방어임을 감독은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릴로와 가까워질수록 몸의 긴장이 풀리고 눈빛이 말랑해지는 변화가 CG임에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두 배우와 CG 캐릭터 사이의 케미스트리(chemistry, 인물 간의 감정적 교감)가 이 영화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아이 눈높이 카메라가 담아낸 작은 존재의 무게

    딘 플라이셔-캠프 감독은 전작 〈마르셀, 신발 신은 조개〉에서도 아주 작은 존재의 시선으로 세상을 담아낸 연출자입니다. 이번에도 그 시선은 일관됩니다. 하와이의 풍경을 촬영할 때 카메라는 지나치게 웅장하거나 관광지 광고 같은 앵글을 피합니다. 대신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릴로가 해변을 걷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낮게 깔려 발밑의 모래와 파도를 함께 담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 모든 시각 요소의 배치와 구성)이 아니라, 큰 세상 속에서 작은 아이가 얼마나 홀로 서 있는지를 구도 자체로 말해주는 방식입니다. 보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해도 몸이 먼저 그 외로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조명도 의도적입니다. 나니와 릴로가 다투는 실내 장면에서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둘 사이를 비추고, 두 사람 사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집니다. 갈등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빛과 그림자로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 흐름)를 이끄는 기법입니다. 반대로 릴로와 스티치가 처음 교감하는 장면은 노을빛 황금 조명 속에 담겨, 시각적으로도 따뜻함이 폭발합니다.

    편집 리듬(editing rhythm, 컷 전환의 속도와 호흡)도 주목할 만합니다. 스티치가 소동을 일으키는 장면은 컷 전환이 빠르고 박자가 경쾌합니다. 그러나 릴로가 부모의 사진을 꺼내 보거나 나니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에 오래 머뭅니다. 빠름과 느림의 대비가 코미디와 감동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게 합니다.

    저는 공장 생산관리를 하던 시절부터 효율과 리듬에 민감했습니다. 1984년 대기업에 입사해 공장합리화를 추진하던 시절, 공정(工程) 하나하나의 템포가 전체 흐름을 좌우한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습니다. 이 영화의 편집은 그 원리를 그대로 담고 있었습니다. 빠른 장면이 있어야 느린 장면이 살고, 웃음이 있어야 눈물이 깊어집니다.

    원작 2002년 애니메이션의 스티치 성우였던 크리스 샌더스가 이번에도 목소리를 맡았다는 것, 원작 배우들이 카메오(cameo, 유명인의 깜짝 단역 출연)로 등장한다는 것도 팬들에게는 반가운 요소였습니다. 저는 원작 팬이라기보다 아들들을 통해 그 영화를 기억하는 아버지였는데, 그 노스탤지어(nostalgia, 과거에 대한 따뜻한 그리움)가 새 영화 위에 자연스럽게 겹쳐졌습니다.

    오하나라는 한 단어가 60대 버스기사의 15년을 건드렸다

    "오하나는 가족, 가족은 아무도 버려두지 않고 잊지도 않는다(Ohana means family, family means nobody gets left behind or forgotten)."

    이 대사가 귀에 박히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전에 이 대사를 들었을 때는 그냥 예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귀여운 메시지 정도로요. 그런데 60대가 된 지금 이 대사를 다시 들으니 무게가 전혀 달랐습니다. 아마도 그 사이 많은 것을 겪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주재원으로 시작해 MRO(Maintenance, Repair & Operations, 제조 현장의 유지보수·소모품 조달 사업) 사업까지, 그 긴 세월 동안 가족은 제 닻이었습니다. 사업이 기울고, 사기를 당하고, 주식 리딩에 돈을 잃으며 바닥을 쳤을 때도 배우자는 곁에 있었습니다. 1999년 위암 수술을 받고도 살아준 그 사람이, 남편이 사업 실패 후 쿠팡과 배민 배달을 뛰고 버스 핸들을 잡아도 단 한 번도 부끄럽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저의 오하나였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오하나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얼굴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스티치는 처음엔 파괴하기 위해 설계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릴로라는 아이가 그를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존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저는 이 설정이 단순한 동화적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경험하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왕따를 당하는 동료, 동네에서 혼자 다니는 어르신, 버스 안에서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청년. 저는 매일 버스를 운전하며 그런 얼굴들을 봅니다. 그들에게 릴로 같은 사람 하나가 있다면 얼마나 다를까 싶습니다.

    이 영화가 전체 관람가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이들은 스티치가 귀여워서 웃고, 어른들은 오하나라는 단어 앞에서 멈춥니다. 세대를 넘어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모셔널 레이어링(emotional layering, 세대와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다층 감정 구조)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이 영화는 완벽한 블록버스터는 아닙니다. 후반부 액션 전개가 다소 빠르게 처리되고, 정서적 여운을 더 길게 이어갔다면 더 좋았겠다 싶은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를 강하게 추천합니다. 특히 자녀와 오랫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부모, 먼 타지에서 홀로 버텨본 경험이 있는 분,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어가 따뜻하기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분들께. 그 무게를 이 영화가 조금 가볍게 해 줄 겁니다.

    극장을 나오면서 저는 큰아들에게 문자를 하나 보냈습니다. "오늘 릴로 & 스티치 봤다. 청도 생각나더라." 답장은 짧았습니다. "저도 보고 싶네요."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오하나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