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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번 날 혼자 영화관에 들어가는 일이 요즘 저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됐습니다. 이백 강의를 들으면서 "경험을 글감으로 쌓아라"는 말이 머릿속에 박힌 뒤로, 영화 한 편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피어스〉라는 제목이 눈에 걸린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대만·싱가포르·폴란드 합작, 감독의 장편 데뷔작, 펜싱을 소재로 한 심리 스릴러. 낯선 조합이 오히려 끌렸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탁구 대표로 뛰면서 스포츠가 단순한 체력 싸움이 아니라 심리전이라는 걸 몸으로 배웠던 저로서는, 펜싱이라는 키워드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습니다.

    좁은 화면 비율이 두 형제의 밀폐된 관계를 고스란히 가두다

    영화관 의자에 앉자마자 화면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일반 와이드스크린에 익숙해진 눈에 1:66:1이라는 화면 비율(세로로 긴 좁은 화면 구성으로, 인물을 수직으로 압박하는 효과를 낸다)은 처음부터 가슴을 조여왔습니다. 배우들이 화면 밖으로 빠져나갈 공간이 없고, 관객도 그 안에 함께 갇히는 느낌이었습니다. 폴란드 출신 촬영감독 미할 디멕이 이 비율을 선택한 이유를 저는 중반부에 가서야 온전히 납득했습니다. 두 형제가 서로를 바라보는 구도가 반복될수록, 그 좁은 틀이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밀실 공포(클로스트로포비아, 폐쇄된 공간에서 느끼는 심리적 압박)를 시각 언어로 번역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펜싱 마스크를 쓴 채 서로를 겨누는 장면, 어둑한 복도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 형 즈한이 동생 즈지에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숨 막히게 가까웠습니다. 감독 넬리샤 로우가 "칼로 두는 체스"라는 펜싱의 본질을 화면 구성 자체에 녹여냈다는 사실을,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온전히 이해했습니다. 조명도 드라마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상적인 빛을 쓰면서 그림자를 절묘하게 배치해 인물의 내면이 이미 어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암시했습니다. 노골적으로 무섭다고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더 무서웠습니다.

    예전이라면 저는 이런 연출을 "답답하다"라고 느꼈을 겁니다. 화면이 좁으면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그 불편함 자체가 감독이 관객에게 건네는 메시지라는 걸, 60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1984년 대기업에 입사해 생산관리 업무를 할 때, 저는 공장의 동선을 좁히고 동선을 단축할수록 효율이 오른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공간을 줄이면 집중도가 생깁니다. 이 영화의 좁은 화면도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다 걷어내고 두 형제만 남겼을 때, 진짜 공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 무너지기 시작한 진실의 무게

    이 영화의 서사 구조(내러티브,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순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이 위험합니다. 7년 전 펜싱 경기 중 상대 선수를 살해한 혐의로 소년원에 수감됐던 형 즈한이 출소하고, 세상이 모두 등을 돌린 그를 오직 동생 즈지에만 믿으며 기다립니다. 형은 동생의 코치가 되고, 동생의 실력은 빠르게 자랍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헌신과 집착, 보살핌과 통제가 뒤엉키면서 동생이 굳게 믿어온 진실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장면들을 보며 2004년 산동성 청도에 첫발을 내디뎠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회사를 믿었고, 조직을 믿었습니다. 주재원 파견이 인정받은 증거라고 생각해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큰아이는 중국 로컬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한국말도 아직 서툰 아이가 중국어 수업을 들으며 처음 몇 달을 울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 즈한이 동생에게 건네는 말과 얼마나 닮았는지 모릅니다. 진심이었지만, 진심이 항상 상대에게 옳은 것은 아니더군요.

    독자 여러분은 누군가를 위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한 선택 중에, 나중에 돌아봤을 때 그게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이었는지 의심스러웠던 적이 있으십니까? 즈한의 선택이 동생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끝까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이었습니다. 그 모호함이 불쾌하면서도 정직했습니다.

    칼끝처럼 날카로운 형제의 집착이 남긴 상처

    신인 배우 류수보의 연기가 저를 가장 오래 붙들었습니다. 그가 연기한 주지에는 열여섯 살 소년이지만 그 눈빛은 결코 어리지 않았습니다. 형을 바라보는 시선에 숭배와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는데, 두 감정이 단 하나의 표정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대사 없이 펜싱 장갑을 끼는 손동작 하나에도 억눌린 감정의 심리적 리얼리즘(배우가 실제 감정 상태를 체화해 표현하는 연기 기법)이 실려 있었습니다. 몸 자체가 말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우녕이 연기한 형 드한은 더욱 섬뜩했습니다. 과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한 눈빛, 미소인지 위협인지 구분되지 않는 표정이 관객을 계속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버스를 운전하며 매일 수백 명의 승객을 관찰합니다. 사람의 눈빛에는 그가 품고 있는 것이 반드시 새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즈한의 눈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려는 눈이었고, 그 연기가 얼마나 정교했는지 저는 실제로 불편했습니다.

    두 배우의 케미(화학적 반응, 배우들 사이의 감정적 연결감)가 이 영화를 살리는 핵심이었습니다. 한쪽이 밀면 한쪽이 당기는 구조가 펜싱의 공방과 정확히 겹쳤습니다. 당신이라면, 세상 전부가 등을 돌린 형제 곁에 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형제가 믿었던 것과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마주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영화는 끝까지 그 대답을 관객에게 떠넘깁니다. 저는 그것이 불만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화관을 나온 뒤에도 그 질문을 들고 버스를 몰았습니다.

    아쉬운 점도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엄마 역할을 맡은 밍밍의 서사가 지나치게 빈약했습니다. 두 형제의 관계가 어디서 왜 뒤틀렸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족 구조가 더 두텁게 그려졌다면, 즈한의 행동이 가진 맥락이 훨씬 설득력 있게 전달됐을 것입니다. 105분이라는 러닝타임도 후반부에서 약간 성급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국면이 좀 더 천천히 숨을 참으며 이어졌다면 충격이 배가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추천 대상은 심리적 긴장감을 즐기는 분, 가족 관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 그리고 연출 의도를 읽으며 영화를 보는 분입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반전을 기대하신다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밋밋함이 이 영화의 무기입니다.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