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버스 동료 기사 한 분이 "형, 이 영화 재밌던데요" 하고 건네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제목만 보고 지나쳤을 겁니다. 수능 귀신에 흑마술이라니, 황당하다 싶었는데 딱 그 황당함이 피곤한 몸을 극장 의자에 붙들어 앉혔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황당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래 남는 영화였습니다.
영혼을 걸고서야 1등이 되는 교실이 진짜 귀신이다
《교생실습》은 100년 전통의 세영여자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모교에 교생으로 부임한 강은경이 학교 안에 도사린 수상한 기운을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핵심 소재는 흑마술 동아리 쿠로이 소라(黒い ソラ, 검은 하늘)와 400년 넘게 학생들의 영혼을 먹으며 젊음을 유지해 온 일본 사무라이 귀신 이 다이나시(いだいなし, 수고가 헛되다는 의미)입니다.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을 주는 대신 영혼을 가져간다는 설정인데, 저는 이것이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은유(隱喩)처럼 읽혔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학창 시절 성적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제 두 아들이 중국 청도 로컬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저는 아이 손을 잡고 60여 명이 가득 찬 교실 앞에 서면서 반쯤 후회했습니다. 중국어 한마디 못 하는 아이를 그 안에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첫 달, 아이는 집에 돌아오면 밥만 먹고 잠들었습니다. 저도 아내도 "오늘 어땠어?" 하고 묻지 못했습니다. 물으면 울 것 같았고, 울면 저도 같이 울 것 같아서였습니다.
3개월쯤 지났을 때 아이가 갑자기 식탁에서 중국어 단어를 줄줄 읊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한 말, 친구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데 발음이 꽤 그럴듯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밥을 먹다 멈췄습니다. 이 아이가 혼자서 그 교실을 버텨낸 거구나.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살아남으려고 스스로 흡수한 거구나. 영화 속 아이들이 귀신에게 영혼을 팔면서까지 1등을 원하는 모습이 그 시절 제 아들의 침묵과 겹쳐 보였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런 설정을 보면 "요즘 애들은 왜 이리 약하냐"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아이들은 약한 게 아닙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경쟁 구조(競爭 構造) 안에서, 귀신이 아니더라도 이미 조금씩 소진(消盡)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가 웃기면서도 끝내 씁쓸하게 남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절제된 눈빛 하나로 400년 묵은 공포를 끌고 간 배우들
한선화가 연기한 교생 강은경은 MZ 세대 특유의 가볍고 발랄한 외피 안에 교권 붕괴(敎權 崩壞)라는 시대의 상처를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한선화의 연기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코미디 호흡과 절박한 감정이 0.5초 간격으로 충돌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웃음을 유발하는 표정을 짓다가 순식간에 눈빛이 흔들리는 그 찰나, 관객은 웃음 속에서 불현듯 먹먹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호러블리 코미디(Horribly Comedy) 장르에서 배우에게 요구되는 가장 어려운 기술입니다. 웃기면서도 슬프고, 가벼우면서도 무게가 있어야 하니까요. 이 영화는 한선화의 첫 스크린 단독 주연작으로,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배우상을 안겨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누군가의 눈빛 하나에 말문이 막혀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버스를 23년째 몰아왔는데, 백미러 속 고등학생들의 눈빛이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웃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지쳐 있고, 떠드는 것 같으면서도 눈은 스마트폰 안에 갇혀 있습니다. 홍예지가 연기한 아오이를 보는 순간, 그 눈빛이 겹쳤습니다. 아오이는 흑마술 동아리 쿠로이 소라의 리더이자 모의고사 국어 전국 1등을 놓치지 않는 인물인데, 감정을 밖으로 흘리지 않습니다. 눈빛 하나, 고개를 1센티미터 기울이는 몸짓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진짜 위험한 것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연기였습니다.
유선호가 맡은 이 다이나시는 호러 톤 전체를 혼자 견인(牽引)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400년 묵은 귀신임에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정인데, 유선호의 연기에서 주목한 부분은 그 눈 속 어딘가에 400년의 피로가 담겨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젊어 보이지만 지쳐 있는 존재, 그 아이러니(irony)가 코미디 장르 안에서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물로 끝나지 않게 해주는 묵직한 닻 역할을 했습니다.
제작비 절반으로 편집까지 혼자 감당한 감독의 버텨냄
김민하 감독은 전작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시리즈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Bucheon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 4년 연속 초청과 2년 연속 2관왕을 기록한 인물입니다. 《교생실습》은 그 라인 위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첫 메이저 상업 장편인데, 제작비가 예상 금액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에서 스태프 95%를 전작과 그대로 유지하며 편집까지 스스로 소화했다고 합니다. 번아웃(burnout)이 올 정도였다는 인터뷰를 읽으면서, 저는 이 영화의 완성도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주어진 것이 턱없이 부족할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2013년 중국 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s, 유지보수·소모성 자재) 사업을 시작할 때, 저는 계획했던 자금의 절반도 안 되는 상태로 문을 열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단 시작하고 버티면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의지한 것은 1984년 대기업 생산관리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원가절감(原價節減)과 공장합리화(工場合理化) 감각이었습니다. 없으면 줄이고, 줄이면 핵심만 남긴다는 원칙이요. 결국 그 사업이 오래 버티지는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몸에 새긴 것들은 지금 버스 핸들을 잡고 있는 저를 여기까지 데려온 힘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김민하 감독도 제작비 부족이라는 제약 조건 안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롱샷(long shot)과 클로즈업(close-up)을 교차하는 방식이 예산 논리가 아니라 연출 논리로 읽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학교 복도를 길게 비추는 롱샷은 공간의 이질감(異質感)을 증폭시키고, 배우의 눈을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은 감정을 관객의 가슴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제작비 절반으로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보면, 이 선택들이 더욱 정직하고 단단하게 느껴집니다.
《교생실습》은 황당한 설정 뒤에 묵직한 현실을 숨겨 놓은 영화입니다. 웃기면서도 불편하고, 가벼우면서도 오래 남습니다. 수능이라는 제도, 교권이라는 현실,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아이들의 지친 눈빛을 이 영화는 귀신이라는 형태로 가시화했습니다. 저처럼 백미러 속 고등학생들의 눈빛이 마음에 걸린 적 있는 분, 자녀 교육으로 고민해 본 부모, 그리고 학교 호러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를 즐기는 분 모두에게 권해드립니다. 제작비 부족이라는 한계를 버팀으로 바꿔낸 감독의 뚝심도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½☆ (3.5/5)
웃음과 공포와 씁쓸함을 동시에 삼킨 드문 영화였습니다.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