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운행을 마치고 귀가하니 밤 열 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배우자는 간호조무사 공부 교재를 펼쳐 놓은 채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고, 저는 조용히 넷플릭스를 열었습니다. 상영 시간 3시간 26분. 재생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졌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이 오래 남는 영화를 만나게 해 줄 줄은 그때 몰랐습니다. 3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이 부담스러웠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는 오히려 더 긴 침묵이 남았습니다.회피가 만든 악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어니스트 버크하트는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입니다. 악당이라면 차라리 편했을 것입니다. 그는 명백히 선하지도, 명백히 악하지도 않은 인간 그 회색 지대의 가장 깊은 곳에 사는 사람입니다.디카프리오의 연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눈빛의 ..
1979년 10월 26일. 저는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담배 수확이 막 끝난 시골 마을, 온 가족이 지쳐 있던 저녁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긴급 뉴스가 흘러나왔고, 어머니는 밥상 앞에서 수저를 멈추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네 살이던 저는 세상이 왜 갑자기 그렇게 조용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침묵의 의미를 〈남산의 부장들〉을 보고 나서야 조금 더 깊이 알게 됐습니다.흔들린 충성이 만들어낸 두 얼굴의 인간이 영화의 심장은 이병헌입니다.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실제 인물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가상 인물)을 연기하는 그의 눈빛은 단 한 장면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앞에서 그의 눈은 낮아집니다. 자세가 작아지고, 말 끝이 흐려지고, 웃음의 타이밍이 0.5초씩 늦습니다. 그런데 ..
노선 끝 회차지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가 에드 해리스의 굵은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연출하고 직접 연기까지 한 사람이라는 소개 글 한 줄에 손가락이 멈췄고, 그날 밤 거실 불을 낮추고 혼자 끝까지 봤습니다.드리핑이 만든 예술세계에드 해리스 감독은 폴락의 그림을 '설명'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정면으로 오래 비추는 대신, 카메라는 폴락이 움직이는 과정 자체 발걸음, 손목의 미세한 떨림, 물감이 캔버스에 닿는 찰나를 끝까지 쫓아다닙니다. 이것은 롱테이크(long take, 편집 없이 길게 이어가는 촬영 기법)와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찍어 미세한 흔들림을 살리는 방식)를 결합한 선택인데, 덕분에 관객은 그림의 의미를 분석하기 전에 그림이 ..
2005년,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의 허름한 주재원 아파트에서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습니다. 화질이 뭉개지는 복사본 DVD였지만, 온 가족이 배꼽을 잡고 웃었던 그 밤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서울 시내버스 핸들을 잡으며 살아가는 60대 초반의 제가 이 영화를 다시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김수미의 눈빛 하나가 조직보다 무서운 어머니를 완성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의 스토리보다 김수미 선생님의 눈빛 하나에 20년째 붙들려 있습니다. 백호파 대모 홍덕자 역을 맡은 그분은 단순한 코미디 연기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도 눈빛 하나로 좌중을 압도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 눈빛은 무서우면서도 어딘가 짠했습니다. 조직의 우두머리이기 전에 자식들 잘 되기를 바라는 ..
버스를 몰다 보면 가끔 승객 중에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묘하게 시선이 가고,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다시 꺼내 본 것도 그런 기분 때문이었습니다. 말 없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이야기.침묵의 눈빛과 신념정우성이 연기한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은 참 말이 없는 인물입니다. 총을 뽑기 직전, 눈을 가늘게 좁히고 상대를 정조준하는 그 눈빛 하나에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신념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과장된 동작이 하나도 없습니다. 군더더기를 걷어낸 그 연기 방식이, 1984년 제가 대기업 공장에서 생산관리를 배울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낭비 제거의 원칙과..
작은아들이 "아버지, 이거 꼭 보세요. 울 수도 있어요"라고 팝콘을 쥐여줬을 때,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마블 영화에서 눈물이라니.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제 옆에 앉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줬습니다.보름달 아래 세 스파이더맨이 착지한 순간, 내 인생의 세 챕터가 겹쳤다토비 맥과이어, 앤드류 가필드, 톰 홀랜드. 서로 다른 평행우주(멀티버스, multiverse)에서 건너온 세 명이 보름달을 등지고 나란히 착지하는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이상하게도 슈퍼히어로의 웅장함보다 세 사람 각각의 눈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어본 사람의 눈, 구하지 못한 사람의 눈, 이제 막 처음으로 잃어보는 사람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