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저녁, 유튜브 알고리즘이 무심하게 내민 예고편 하나가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예순이 넘은 버스 기사가 팝스타 영화를 보러 극장까지 간다는 게 처음엔 스스로도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이클이 아버지 조지프의 눈빛 앞에서 온몸을 떨며 노래하는 그 짧은 장면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스포트라이트가 숨길 수 없었던 소년의 두 얼굴앤트완 퓨콰 감독은 《트레이닝 데이》(2001)에서도 그랬듯 인간 내면의 명암을 조명 하나로 설명하는 감독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 솜씨는 한층 더 정교해졌습니다.무대 장면에서는 스포트라이트(집중 조명)가 마이클 한 명을 태울 듯 강렬하게 쏟아지고, 나머지 공간은 완전한 어둠 속에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아버지..
버스 운행을 마치고 차고지에 들어서는 날, 후배 기사 한 분이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선배님, F1 영화 보셨어요? 브래드 피트 나오는 거요." 저는 F1을 그렇게 즐겨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탑건: 매버릭을 아주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 작품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움직였고, 결국 혼자 극장 좌석을 예매했습니다. 그날 제가 스크린 앞에서 멈춰 선 이유는, 단순히 자동차 경주가 궁금해서가 아니었습니다.삼십 년 만에 다시 잡은 핸들, 그 손이 떨렸을 이유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소니 헤이스의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묘하게 쿵 내려앉았습니다. 화려한 서킷이 아닌, 어딘가 허름한 트랙에서 고용된 드라이버로 핸들을 잡고 있는 그 남자의 뒷모습. 저는 그 뒷모습에서 오래된 무언..
새벽 4시 반, 차고지에서 버스 시동을 걸며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사람인가. 버스기사, 가장, 아빠, 남편, 아직 꿈을 버리지 못한 60대 남자. 살아오면서 불려 온 이름이 열 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이름마다 저는 매번 다른 사람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언더커버데디'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멈칫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위장하는 아빠. 어쩐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위장 근무하는 아빠, 그 눈빛이 모든 걸 들켰다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주인공의 "들키는 눈빛"입니다. 단단한 요원이어야 하는 장면에서도, 아이가 위험에 처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마다 그의 눈에는 0.5초도 안 되는 찰나에 뭔가 흔들리는 빛이 지나갑니다. 그 흔들림이 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지탱..
야간 운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새벽 한두 시가 넘을 때가 많습니다. 그날도 허리 스트레칭을 하면서 습관처럼 폰을 뒤적이다 예고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지소라는 배우가 낯선 공간에서 누군가를 묶어놓는 장면, 그리고 그 인질이 자기 이복언니라는 자막. 손가락이 멈췄습니다. 허리 아픈 것도 잊고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동생을 살리려다 선을 넘어버린 해란의 막다른 선택해란(정지소)이 이복언니 소진을 납치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동생의 수술비 10억. 이복언니가 부잣집에서 아무 부족함 없이 자라는 동안, 자기는 동생을 살리려고 남의 손발을 묶어야 했습니다.저는 이 장면에서 손이 떨렸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혼자 떠안는 그 감각이 낯설지 않았기 때..
버스 운전을 하다 보면 명절 직전이 제일 묘합니다.지난 설 연휴 전날 오후, 6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어머니와 40대 아들 둘이 나란히 탔습니다. 두 정거장도 못 가서 작은아들 쪽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형이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해." 어머니가 "조용히 해, 사람들 있잖니" 하고 말렸지만 이미 불씨가 붙은 뒤였습니다. 저는 룸미러로 세 사람을 슬쩍 살피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 어머니, 오늘 명절 며칠이나 버티실까.'그날 이후 줄곧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장면이었는데, 〈직사각형, 삼각형〉을 보면서 그 버스 안 세 사람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운행을 마치고 회사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위에 올라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짧은 예고편이 알고리즘에 걸렸습니다. 45분짜리 중편이라는 소개가 오히려..
버스를 몰다 보면 한강 다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건넙니다. 저는 늘 그 물을 잠깐 봅니다. 신호도 아닌데 잠깐 보게 됩니다. 그게 버릇이 됐습니다."데스리버"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물이 먼저 떠올랐습니다.존재하지 않는 영화 앞에서, 존재하는 삶을 마주하다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이번에 이 영화를 찾아보려다가 당황했습니다. 국내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데스리버"라는 제목의 작품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KMDB(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 영화를 봤다거나 기억한다거나 하는 건 거짓말이 됩니다. 60년 넘게 살면서 거짓말은 결국 사람을 더 좁은 데로 몰아넣는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10년 전 사기를 당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