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땀을 식히다가 CGV에 들어섰습니다. 박찬욱 감독에 이병헌, 손예진이라는 조합이라면 무조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리는 뻐근했지만 마음은 뭔가 묵직한 것을 담고 싶었습니다. 평소 버스 운전 중 공백 시간이 생기면 영화 한 편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해고 통보를 받은 그 멈춘 눈빛이 내 얼굴이었다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유만수(이병헌)가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습니다. 이병헌은 그 순간 분노하지 않습니다. 눈물도 쏟지 않습니다. 그냥 멍하니 있습니다. 그 공백이 오히려 더 무겁습니다. 관객은 그 정지된 표정 속에서 25년이라는 시간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
비번 날 오전, 아내가 요양보호사 시험 문제집을 펼쳐놓은 식탁 옆에서 저는 조용히 외투를 챙겨 나왔습니다. 목적지는 극장이었습니다. 60대 초반 남자가 일본 미스터리 영화를 혼자 보러 간다고 하면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혼자 극장 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중국 청도 공장에서 야근을 마치고 현지 극장에 앉아 중국어 자막 영화를 보던 그 시절부터 생긴 습관입니다. 언어를 반도 못 알아들어도 화면 속 사람의 눈빛만으로 충분히 울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파이널 피스》는 그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영화였습니다.말 없는 눈빛이 장기판 위에서 모든 것을 말했다사카구치 켄타로가 케이스케를 연기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그는 말을 아낍니다. 가정폭력을 견디며 새벽 신..
버스 운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밤 열한 시가 넘습니다. 샤워를 하고 나서 소파에 앉으면 몸은 천근만근인데 머리는 오히려 말똥말똥해지는 그 이상한 시간, 저는 무언가를 보거나 읽어야 겨우 잠이 듭니다. 그날도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더 루미 너 리스》라는 제목이 눈에 걸렸습니다. '루미 너 리스(Luminaries)'빛나는 존재들. 제목 하나가 마음을 붙잡았고, 저는 그냥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예순을 넘긴 버스 기사가 새벽 한 시에 영국·뉴질랜드 합작 미니시리즈를 보고 있다는 게 어울리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리느냐 아니냐를 따질 나이는 이미 지났습니다.낯선 땅에 발을 디딘 자만이 아는 첫날밤의 무게1860년대 황금에 눈먼 자들이 뉴질랜드로 몰려들던 시대, 배에서 내리는 젊은 여성 애..
버스를 마치고 돌아온 밤, 넷플릭스 알고리즘이 불쑥 《검객》을 띄워놓았습니다. 한쪽 눈을 감은 채 칼을 쥔 장혁의 얼굴이 화면에 꽉 차 있었고, 피곤하면 금세 잠드는 편인데 그날은 100분 내내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보고 나서 한참을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게 아니라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 남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말 없는 눈빛 하나로 아비의 사랑을 전한 장혁의 연기장혁이 연기하는 태율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말을 걸어옵니다. 한쪽 눈을 잃은 채 세상을 등진 검객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비극의 응축인데, 장혁은 그것을 과잉 감정 없이 남은 한 눈의 눈빛 하나로 전달합니다. 딸 태옥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그의 눈에는 보호와 미안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습..
퇴근길에 동료 기사가 "요즘 볼 만한 영화 있어요?" 하고 물었을 때, 저는 며칠 전 혼자 조용히 다녀온 극장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93분짜리 액션 영화라니, 처음엔 지친 몸을 좌석에 기대고 눈이나 즐겁게 해 주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좌석에서 몸을 곧추세우고 있었습니다. 스크린 속 니키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떨리는 손이 멈추지 않는 이유 - 밀라 요보비치의 두 얼굴밀라 요보비치는 이 영화에서 두 개의 얼굴을 동시에 살아냅니다. 전직 특수부대원이라는 강인한 껍데기 안에, 딸의 어린 시절을 통째로 놓쳐버린 어머니의 죄책감이 켜켜이 쌓여 있는 얼굴입니다.클로이 납치 소식을 접한 직후의 장면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분노와 공황이 0.5초 간격으로 교차하는 눈빛..
버스 운행을 마치고 차고지에 들어서는 날, 후배 기사 한 분이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선배님, F1 영화 보셨어요? 브래드 피트 나오는 거요." 저는 F1을 그렇게 즐겨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탑건: 매버릭을 아주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 작품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움직였고, 결국 혼자 극장 좌석을 예매했습니다. 그날 제가 스크린 앞에서 멈춰 선 이유는, 단순히 자동차 경주가 궁금해서가 아니었습니다.삼십 년 만에 다시 잡은 핸들, 그 손이 떨렸을 이유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소니 헤이스의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묘하게 쿵 내려앉았습니다. 화려한 서킷이 아닌, 어딘가 허름한 트랙에서 고용된 드라이버로 핸들을 잡고 있는 그 남자의 뒷모습. 저는 그 뒷모습에서 오래된 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