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택시 자격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물 면허도, 시내버스 핸들도 저에게 운전은 밥줄이자 자존심입니다. 2017년 개봉 당시 〈택시운전사〉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 같은 사람 이야기겠구나" 싶었지만, 그때는 중국 MRO 사업이 무너지던 시절이라 극장에 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영화를 제대로 마주한 건 버스 운전을 시작하고 한참 뒤, 늦은 밤 배차를 끝내고 기숙사 방에 혼자 누워서였습니다. 작은 핸드폰 화면이었지만 영화는 조금도 작지 않았습니다.돈을 위해 잡은 핸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떨리기 시작했다송강호가 연기한 만 섭은 처음에 그냥 돈 때문에 움직입니다. 밀린 월세, 딸아이 밥값. 독일 기자를 태우고 광주까지 가면 큰돈을 받는다는 말에 덜컥 핸들을 잡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피식 ..
버스 운행을 마치고 기사 대기실 소파에 몸을 기댄 늦은 밤, 핸드폰을 무심코 스크롤하다 손예진과 낯선 중국 배우가 나란히 선 포스터가 눈에 걸렸습니다. 한국·중국 합작, 제주도 올 로케이션, 펑 샤오강 감독의 제자 연출작. 이 세 단어가 겹치는 순간 손가락이 멈췄습니다. 중국에서 15년을 살았던 저로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조합이었습니다.어리숙한 선의가 불러온 제주도 소동과 나의 중국 첫날영화는 중국인 관광객 창주(진백림)가 제주도 여행 중 쓰러진 한국 여성 지연(손예진)을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선의로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총성이 울리고 납치 사건에 휘말립니다. 창주의 눈이 커지며 굳어 버리는 그 순간, 저는 피식 웃다가 멈췄습니다. 2004년 청도에 처음 발령받던 날 제 얼굴이 딱 그랬기 때문입니다..
버스 운전을 마치고 기숙사 방에 돌아오면 저는 대개 유튜브를 틀어 놓고 발을 뻗습니다. 그날도 그랬는데, 예고편 하나가 손을 멈추게 했습니다. 엠마 왓슨이 고개를 숙인 채 어둑한 공간 안에 서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눈빛이 낮에 백미러로 봤던 어떤 승객의 눈빛과 겹쳤습니다. 무언가를 꾹 누르고 있는 사람의 눈빛. 그래서 클릭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순종하는 척 타오르는 눈빛 - 엠마 왓슨이 레나를 살아내는 방식영화의 배경은 1973년 칠레입니다.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던 바로 그해, 루프트한자 승무원 레나는 남자친구 다니엘이 비밀경찰 DINA(칠레 비밀정보국)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를 구하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콜로니아 디그니다드(Colonia ..
2019년 1월, 저는 처음으로 서울 시내버스 운전석에 앉았습니다. 중국에서 MRO 사업이 무너지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가장 무거웠던 그 시기에, 회사 동료가 "형, 그냥 웃기만 해도 되는 영화 하나 봐요"라며 건넨 것이 바로 이 영화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고마웠습니다.해체 위기의 마약반이 치킨집 앞치마를 두르게 된 날영화는 처음부터 솔직합니다. 마약반은 잘 나가는 팀이 아닙니다. 실적은 바닥이고, 팀 해체가 코앞이며, 팀원들의 표정엔 만성 피로와 자조가 한데 뒤섞여 있습니다. 이 설정이 저는 조금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청도와 웨이하이에서 8년간 공장을 관리하고, MRO 사업에 뛰어든 지 몇 년 만에 신뢰했던 파트너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 저도 딱 그 표정이었으니까요.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경찰공무원인 큰아들이 쉬는 날 잠깐 들렀다가 휴대폰으로 예고편을 틀어 보여줬습니다. "아버지, 신현준이 집배원이랑 냉혈한 범죄자를 동시에 한다는데요." 화면 속에서 신현준이 순박한 얼굴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다음 장면에서 서늘한 눈빛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손이 절로 갔습니다. 마침 다음 날이 쉬는 날이었고, 버스 핸들을 놓은 날 아들과 극장을 찾는 것도 꽤 오랜만이라 그냥 나가자고 했습니다. 시내버스를 매일 몰며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저에게 "얼굴이 같은 두 사람"이라는 설정은 단순한 코미디 이상의 무언가로 다가왔습니다.신현준의 눈빛 하나가 집배원과 범죄자, 두 인생을 갈랐다신현준이 이 영화에서 선보이는 1인 2역(one-man dual role, 한 배우가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방식)..
쉬는 날 오후, 허리가 뻐근해 소파에 누운 채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우연히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1920년대 프랑스 리비에라, 마술사, 심령술사라는 조합이 딱 "머리 비우기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저는 등을 곧추세우고 있었습니다. 화면 속 스탠리의 눈빛이 제 젊은 시절을 너무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0년 이성주의자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순간콜린 퍼스가 연기한 스탠리는 첫 장면부터 눈빛 하나로 캐릭터의 전부를 설명합니다. 소피를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 그의 시선은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는 과학자의 것과 같습니다. 경멸이 아닙니다. 확신입니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 눈꼬리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그런데 소피가 스탠리만 알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