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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놈은 죽는다

    버스 운행을 마치고 기사 대기실 소파에 몸을 기댄 늦은 밤, 핸드폰을 무심코 스크롤하다 손예진과 낯선 중국 배우가 나란히 선 포스터가 눈에 걸렸습니다. 한국·중국 합작, 제주도 올 로케이션, 펑 샤오강 감독의 제자 연출작. 이 세 단어가 겹치는 순간 손가락이 멈췄습니다. 중국에서 15년을 살았던 저로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조합이었습니다.

    어리숙한 선의가 불러온 제주도 소동과 나의 중국 첫날

    영화는 중국인 관광객 창주(진백림)가 제주도 여행 중 쓰러진 한국 여성 지연(손예진)을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선의로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총성이 울리고 납치 사건에 휘말립니다. 창주의 눈이 커지며 굳어 버리는 그 순간, 저는 피식 웃다가 멈췄습니다. 2004년 청도에 처음 발령받던 날 제 얼굴이 딱 그랬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생산관리 경력 20년을 등에 업고 중국 공장 관리책임자로 자신 있게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첫 회의에서 표준 중국어와 산동 사투리가 뒤섞인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메모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고, 며칠 후 그 고개 끄덕임이 라인 전체 작업 순서를 바꾸는 결정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나섰다가 총성에 휘말린 창주의 황당함이 정확히 그 아찔함이었습니다.

    진백림은 선량함과 어리숙함의 경계를 오가는 인물을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표정, 선뜻 물러서지 못하는 몸의 망설임으로 실감 나게 구현합니다. 과장 없이 절제된 이 몸짓이 오히려 더 웃깁니다. 보통 사람이 비일상적 사건에 휘말렸을 때의 당혹감이란 저렇게 아주 조용하게 온몸으로 번지는 것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선의로 건넨 손 하나가 예상치 못한 소용돌이의 시작이 됐던 순간 말입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지연도 주목할 만합니다. 쓰러진 채 발견되는 첫 등장부터 그녀의 눈빛은 단순한 피해자의 것이 아닙니다. 의식을 잃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계산된 느낌, 살짝 닫힌 눈꺼풀 아래 감춰진 긴장감이 묘하게 불안을 심어 줍니다. 코미디와 스릴러 사이를 오가는 장르적 혼종 안에서도 감정 선을 함부로 흐트러뜨리지 않는 절제가 이 영화를 단순한 소동극으로만 읽히지 않게 잡아 줍니다.

    쫓기는지 쫓는지도 모르던 혼돈이 만든 블랙 코미디의 문법

    이 영화의 가장 영리한 선택은 제주도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장르의 공모자'로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유채꽃밭, 검은 현무암 해안, 푸른 올레길이라는 평화로운 풍경 위에 총성과 납치를 얹어 놓는 이 대비가 블랙 코미디(black comedy, 비극적 소재를 웃음으로 풀어내는 장르)의 핵심 문법입니다. 입봉작(감독 데뷔 첫 작품) 임에도 손호 감독은 이 리듬을 꽤 능숙하게 다룹니다.

    카메라는 쫓고 쫓기는 장면에서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를 손에 들고 촬영하는 기법)를 적극 활용해 숨 가쁜 긴박감을 전달하면서도, 인물이 잠시 멈추는 순간에는 넓은 부감 숏(bird's eye shot,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구도)으로 제주의 전경을 품어 안습니다. 이 리듬의 교차가 관객에게 '위험하지만 결국은 유쾌한 소동'이라는 정서적 안전감을 줍니다.

    저는 그 쫓고 쫓기는 장면에서 웃다가 갑자기 멈춘 순간이 있었습니다. 2013년 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s, 소모성 자재 조달 사업) 사업을 시작하며 사기를 당했던 기억이 불쑥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중국 15년의 인맥과 경험을 믿고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돈이 엉뚱한 방향으로 새기 시작했고 믿었던 파트너가 계약서를 들이밀며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때 창주처럼 뛰었습니다. 은행, 법무사, 지인, 또 다른 지인. 쫓기는 자인지 쫓는 자인지 경계가 흐릿한 채로 그냥 뛰었습니다. 결국 수천만 원을 날렸고, 한국에 돌아와 2019년 버스 핸들을 잡았습니다. 그때를 지금 다시 돌아보면 어떻게 그 속에서 살았나 싶은데, 당시엔 그냥 뛰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신현준이 연기한 수상한 남자는 시선을 좀처럼 정면으로 두지 않는 습관적 회피 연기로 '저 사람이 진짜 나쁜 놈인가'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눈 맞춤을 피하되 완전히 숨지 않는 절묘한 중간 지점, 이 모호함이 영화 내내 관객의 판단을 흔드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나쁜 놈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범하다는 것, 중국에서 사기를 당해 본 저로선 그 장치가 단순한 연기 기술 이상으로 읽혔습니다.

    여러분은 영화를 보면서 인물의 눈빛만으로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짜 나쁜 놈은 결국 드러난다는 믿음이 재기의 힘이 됐다

    이 영화가 전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는 제목 그 자체입니다. 나쁜 놈은 반드시 죽는다.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틀)상 그것은 약속입니다. 관객은 그 약속을 믿기 때문에 소동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런 식의 권선징악(勸善懲惡) 구조를 다소 유치하다고 봤습니다. 현실은 나쁜 놈이 잘 살기도 하고, 선의로 뛴 사람이 더 다치기도 한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됐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달리 봅니다. 그 단순한 믿음이 없으면 다시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쿠팡 배달을 뛰다가 어두운 골목에서 오토바이가 넘어졌을 때, 무릎을 긁히고도 "배달비 날리면 안 되는데" 하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욕실 거울 앞에 서서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사기당하고 손해 보고 긁히고 넘어지고, 그런데도 벌떡 일어나는 이 인생이 어디선가 블랙 코미디를 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성실하게 뛰는 사람이 이긴다는 믿음, 그것이 지금 제가 이 나이에 블로그를 시작하고 N잡을 하는 이유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합전산망 기준으로 이 영화는 국내 개봉 당시 약 30만 명의 관객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링크) 한중 합작 작품으로서 중국 현지 배급까지 고려한 기획이었으나, 국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흥행 성적이었습니다. 이 시기 한중 합작 영화들이 대부분 겪었던 구조적 한계, 즉 두 나라 관객 모두를 겨냥하다 어느 쪽에도 깊이 안착하지 못하는 문제를 이 영화 역시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보고서에 따르면 2013~2016년 사이 한중 합작 영화는 약 40편 이상 기획·제작되었으나 양국 모두에서 흥행에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링크) 이 통계가 말해 주는 것은 콘텐츠의 질보다 구조적 문제였습니다. 두 나라 시장의 코드를 동시에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그 구조적 한계 안에서도 이 영화가 건져 낸 것은 분명 있습니다.

    -제주도라는 공간이 품은 이국적 아름다움과 긴박한 액션의 대비
    -선의로 나섰다가 혼돈에 빠지는 보통 사람의 당혹감
    -나쁜 놈은 결국 드러난다는 단순하지만 힘 있는 메시지

    여러분 주변에도 선의로 뛰었다가 혼돈에 빠진 경험이 한 번쯤 있지 않으셨나요?

    이 영화는 걸작은 아닙니다. 장르의 혼종이 가끔 방향을 잃고, 두 나라 관객 사이의 감각 차이가 불협화음으로 드러나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15년을 살고 돌아온 제게, 그리고 선의 하나로 뛰어들었다가 총성을 들어 본 적 있는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꽤 따뜻한 블랙 코미디입니다. 나쁜 놈은 죽는다는 약속을 믿으며 오늘도 버스 핸들을 잡습니다.

    추천 대상: 한중 문화 차이에 관심 있는 분, 제주도 배경 오락 영화를 찾는 분, 복잡한 생각 없이 유쾌하게 즐기고 싶은 분.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