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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 운행을 마치고 차고지에 들어서는 날, 후배 기사 한 분이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선배님, F1 영화 보셨어요? 브래드 피트 나오는 거요." 저는 F1을 그렇게 즐겨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탑건: 매버릭을 아주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 작품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움직였고, 결국 혼자 극장 좌석을 예매했습니다. 그날 제가 스크린 앞에서 멈춰 선 이유는, 단순히 자동차 경주가 궁금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삼십 년 만에 다시 잡은 핸들, 그 손이 떨렸을 이유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소니 헤이스의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묘하게 쿵 내려앉았습니다. 화려한 서킷이 아닌, 어딘가 허름한 트랙에서 고용된 드라이버로 핸들을 잡고 있는 그 남자의 뒷모습. 저는 그 뒷모습에서 오래된 무언가를 읽었습니다. 잊힌 꿈의 냄새, 혹은 한때 자신이 빛났다는 것을 스스로도 반쯤 믿지 못하는 사람의 냄새라고나 할까요.

    브래드 피트가 이 작품에서 택한 연기의 핵심은 '절제'라고 생각합니다. 소니 헤이스는 말이 많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눈빛으로 말합니다. 1993년 스페인 그랑프리의 사고 장면이 플래시백(flashback, 과거 장면을 현재 서사에 삽입하는 편집 기법)으로 등장할 때마다 브래드 피트의 눈에는 공포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감정이 스쳐 지나갑니다. 후회와 갈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눈빛입니다.

    배우가 대사 없이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 중 가장 고난도가 바로 이 이중 감정의 공존입니다. 브래드 피트는 헬멧을 쓰기 직전 잠깐 허공을 응시하는 습관적 몸짓을 영화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합니다. 불과 2~3초에 불과하지만, 저는 그 2~3초가 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압축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찰나, 두려움과 결단 사이의 찰나. 예순을 바라보는 남자가 다시 핸들을 잡기 전의 그 찰나 말입니다.

    몸짓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젊은 드라이버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가 넘치는 에너지로 피트레인(pit lane, 레이스카 정비와 교체가 이루어지는 구역)을 활보할 때, 소니는 어깨를 살짝 낮추고 보폭을 짧게 유지합니다. 이것은 주눅 든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된 강이 좁은 폭에서도 깊게 흐르는 것처럼, 자기 속도를 아는 자의 걸음입니다. 브래드 피트는 그 차이를 의상이나 표정이 아닌 무게중심으로 표현해 냅니다. 저는 그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탁월한 신체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오랫동안 손에서 놓아두었던 무언가를 다시 잡으려 할 때, 그 손이 이유도 모르게 살짝 굳어지는 느낌 말입니다. 저는 2019년 봄, 버스 핸들을 처음 잡던 날이 그랬습니다. 2013년부터 7년간 중국에서 MRO 사업(Maintenance, Repair & Operations, 산업용 소모품 및 부품 조달 사업)을 꾸려왔는데, 사기 피해와 주식 리딩 피해가 겹치면서 사업이 무너졌습니다. 중국에서 15년을 살며 쌓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내려앉은 느낌이었고, 그때 제 나이가 쉰넷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 잡은 것이 서울 시내버스 핸들이었는데, 대기업 공장에서 생산관리를 하고 중국 공장 책임자로 수백 명을 이끌던 손이 낯선 핸들 앞에서 잠깐 굳었습니다. 부끄럽거나 억울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낯설고, 또 결연했습니다. 소니 헤이스가 레이스 슈트를 다시 입는 장면에서 저는 그 감각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저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냐'는 생각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보다, 그 사람이 왜 다시 일어섰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긴 변화인 것 같습니다.

    카메라가 속도 대신 두려움의 순간을 선택한 이유

    탑건: 매버릭에서도 증명되었듯,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기계의 속도가 아닌 인간의 감각을 찍는 감독입니다. F1 더 무비에서 그의 카메라는 놀랍도록 차분합니다. 시속 300킬로미터를 넘나드는 레이스카 안에서 카메라는 속도계나 바퀴가 아닌, 드라이버의 눈동자와 턱 선,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을 향합니다.

    이것은 프레이밍(framing, 피사체를 화면 안에 배치하는 구도 선택) 전략의 문제입니다. 롱샷(long shot, 피사체 전체와 배경을 넓게 담는 촬영)으로 서킷 전경을 보여줄 때는 관객에게 스케일의 압도감을 주고, 클로즈업(close-up,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크게 담는 촬영)으로 전환할 때는 그 광활한 공간 안에 홀로 남겨진 인간 한 명의 고독함을 대비시킵니다. 이 대비가 이 영화의 감정적 핵심입니다.

    촬영감독 클라우디오 미란다는 실제 F1 경기 주말에 레이스카에 카메라를 탑재해 촬영했습니다. 덕분에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 컴퓨터로 생성한 시각 효과)에 의존하지 않은 장면들이 눈에 띄게 많습니다. 화면의 질감이 다릅니다. 타이어 연기,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아지랑이, 피트월(pit wall, 팀 엔지니어들이 전략을 지휘하는 구역)에서 긴장한 채 초시계를 누르는 손. 이것들은 컴퓨터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온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스 짐머는 이 영화에서 웅장한 오케스트라 대신 전자음향과 엔진음을 뒤섞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결승선을 향해 마지막 랩을 도는 소니의 장면에서 배경음악과 엔진 사운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저는 그 장면에서 시각보다 청각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회사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뛸 때 이어폰을 끼고 호흡과 발소리를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과 심박이 구분되지 않는 경험을 합니다. 코신스키 감독이 의도한 것이 바로 그 감각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영화를 볼 때 카메라 앵글에 의식적으로 주목하는 편이십니까?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냥 흘러가는 화면을 따라갔는데, 탑건: 매버릭 이후로 코신스키 감독의 영화만큼은 카메라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게 그의 영화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노장의 레이스는 트랙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 영화의 갈등 구조는 표면적으로는 소니와 조슈아의 세대 갈등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이 영화의 진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싸움은 소니가 트랙 위에서 자기 자신의 두려움과 벌이는 내면의 레이스입니다. 각본상 갈등 구조를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으로 내러티브 드라이브(narrative drive, 이야기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내적 동력)가 있는데, F1 더 무비의 그것은 엔진이 아니라 소니의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루벤 세르반테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는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팀을 살리기 위해 오랜 친구를 다시 불러내야 하는 현실적 인간입니다. 바르뎀은 그 복잡한 마음을 대사의 속도로 표현합니다. 긴 말을 할 때는 빠르게, 핵심을 던질 때는 아주 천천히. 이 완급 조절이 루벤이라는 인물에게 무게감을 줍니다.

    케리 콘던이 맡은 캐릭터는 아쉽게도 서사적 역할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팀 내 기술 전략가로 등장하지만, 그의 판단이 실제 레이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장면이 적습니다. 이 부분은 이 영화의 분명한 약점입니다. 155분이라는 상영 시간 안에 여러 인물을 담으려다 일부 캐릭터의 입체성이 희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버스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경력으로 보면 제가 막내였으니,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시선이 중요하지 않아 졌습니다. 2024년 10월부터 매일 헬스장에서 러닝을 뛰고 턱걸이를 하다 보니, 몸이 먼저 달라졌고 마음이 그 뒤를 따라왔습니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제가 지금은 북한산을 오릅니다. 그리고 2025년 12월 21일부터는 금연도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힘과 의지가 함께 만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소니 헤이스가 두려움을 안고서도 레이스에 나서는 장면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 과정을 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오래 멈춰두었던 레이스가 있다면, 그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F1 더 무비는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155분 동안 이야기의 템포가 고르지 않고, 조슈아와 소니의 관계가 후반부에 다소 급격하게 봉합되는 느낌도 있습니다. 케리 콘던의 캐릭터는 존재감에 비해 서사적 역할이 약하고, 레이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속도가 아니라 사람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F1이라는 세계를 전혀 모르는 분도, 한 번쯤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해본 분이라면 충분히 공명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특히 인생의 전반부를 치열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뭔가 멈춰 있다는 느낌을 가진 40~60대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