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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오후, 허리가 뻐근해 소파에 누운 채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우연히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1920년대 프랑스 리비에라, 마술사, 심령술사라는 조합이 딱 "머리 비우기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저는 등을 곧추세우고 있었습니다. 화면 속 스탠리의 눈빛이 제 젊은 시절을 너무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0년 이성주의자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순간
콜린 퍼스가 연기한 스탠리는 첫 장면부터 눈빛 하나로 캐릭터의 전부를 설명합니다. 소피를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 그의 시선은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는 과학자의 것과 같습니다. 경멸이 아닙니다. 확신입니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 눈꼬리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소피가 스탠리만 알 수 있는 사실을 정확히 맞혀낼 때, 퍼스는 눈을 크게 뜨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그저 아주 미세하게 턱을 당깁니다. 그 작은 동작 하나가 60년 이성주의자의 내부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지진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습니다. 퍼스는 2011년 《킹스 스피치》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답게, 과잉 없이 진심을 전합니다. (출처: IMDb, 링크)
에마 스톤의 소피는 정반대입니다. 눈이 먼저 웃고, 입이 나중에 따라옵니다. 스탠리가 날카로운 말로 공격할 때마다 소피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바라보는데, 그 자세에서 묘한 여유가 풍깁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뿐이에요"라는 무언의 메시지입니다.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chemistry, 배우 간의 호흡)는 대사보다 이 눈빛과 몸의 각도에서 먼저 완성됩니다.
독자분들은 어떠십니까? 누군가에게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스탠리를 보면서 웃음이 났습니다. 한때의 제 모습이 너무나 또렷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1984년 대기업 공채로 입사해 생산관리, 원가절감, 공장합리화를 밥 먹듯 추진하던 시절, 저의 신조는 단 하나였습니다. "숫자로 말하라, 데이터로 증명하라." 보이지 않는 것, 측정되지 않는 것은 경영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몸에 뼈처럼 박여 있었습니다. 중국 산동성 청도와 웨이하이의 공장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정과 효율과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했고, 그것이 옳은 줄만 알았습니다.
스탠리가 흔들리던 그 장면, 저는 그 눈빛의 의미를 남들보다 조금 더 깊이 알 것 같습니다.
우디 앨런이 프랑스 햇살 아래 숨겨둔 철학적 질문
우디 앨런은 1920년대 남프랑스 리비에라를 배경으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대극 취향이 아닙니다. 그 시대는 과학과 합리주의(rationalism, 이성을 지식의 근원으로 보는 철학적 태도)가 유럽에서 절정에 달하던 때입니다.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로 인해 사람들이 영혼과 신비에 목말라하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앨런은 그 시대적 긴장감 위에 스탠리와 소피를 정확하게 올려놓았습니다.
카메라는 내내 따뜻한 황금빛 조명, 즉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구성 전체의 시각적 연출)으로 가득합니다. 이 빛은 관객에게 속삭입니다. "지금 보시는 건 가볍고 즐거운 로맨스입니다"라고. 그러나 그 빛 아래 나누는 대사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신의 존재, 우주의 의미, 인간의 자유의지. 우디 앨런은 이 무거운 질문들을 샴페인 잔에 담아 내밉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남프랑스 코트다쥐르 지역은 실제로 피카소, 마티스, 피츠제럴드 등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이 모여들던 곳이었습니다. 앨런은 그 지적 열기를 고스란히 빌려와 스탠리의 이성과 소피의 신비를 부딪히게 만든 것입니다. (출처: 나무위키, 링크)
이 영화가 국내에서 누적 관객 77,308명에 그친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우디 앨런 특유의 지적 농담(intellectual humor)과 유럽적 정서가 국내 대중에게 낯설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지금 다시 보면 더 깊이 와닿는 작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성과 감성 중 어느 쪽을 더 신뢰하십니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예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 스탠리가 소피에게 설득당하는 장면을 "남자가 여자한테 졌네" 정도로 가볍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그건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스탠리가 처음으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장면, 그것이 이 영화의 진짜 절정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훨씬 더 그 장면에 공감합니다.
데이터로 살다 사람을 배운 버스 핸들 위의 깨달음
중국 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s, 소모성 자재 및 유지보수 용품 거래) 사업 7년을 접고 귀국한 뒤, 저는 쿠팡 배달을 뛰고 배민 배달을 뛰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부터 서울 시내버스 운전석에 앉았습니다. 그때의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10년 전 사기 피해와 주식 리딩 사기 피해가 겹쳐 있었고, 숫자와 이성으로 평생을 살았다고 자부했던 제가 감정과 신뢰의 틈새에서 속절없이 당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버스 핸들을 처음 잡던 날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날 첫 승객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출발했다가 넘어지실 뻔해서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할머니는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괜찮아요, 젊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공장 현장에서 수백 개의 원가절감 보고서보다 더 크게 저를 흔들었습니다.
매일 수백 명의 사람이 제 버스에 탑니다. 출근하는 직장인, 장을 보러 가는 어르신, 교복 입은 학생, 병원 가는 환자. 백미러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조금씩 배웠습니다. 사람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생은 데이터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변화의 시간을 지나 2023년 9월 28일, 저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24년 9월 1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평생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던 제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까지, 스탠리가 소피 앞에서 흔들리던 것과 같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저도 스탠리처럼, 이성의 갑옷을 스스로 벗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독자분들 중에도 혹시 "나는 합리적으로 살았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신 분이 계십니까? 그 질문이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입니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폭발도 없고 반전도 없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프랑스 햇살 아래 대화하고 걷고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조용함 속에서 "당신은 지금 무엇을 믿고 사십니까?"라는 질문이 계속 따라옵니다. 저처럼 평생 이성과 효율로 살다가 어느 날 균열이 생긴 분들, 혹은 지금 이성과 감성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분들에게 특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진짜 마술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이라는 걸, 이 영화는 97분 내내 조용히 증명합니다.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