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송 감독이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데뷔작으로, 그레타 리와 유태오가 주연을 맡아 12살에 헤어진 두 사람이 24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대사보다 침묵과 시선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절제된 연출이 특징이며, 이민과 정체성, 인연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드라마다.종각역 7시 23분 정류장에서 매일 타던 40대 남성이 두 달 만에 다시 나타났을 때, 저는 그냥 출입문 버튼만 눌렀습니다.얼굴이 부어 있었고, 정수리가 훤했습니다. 항암 치료를 받은 게 분명했는데, 저도 그 사람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말로 다 못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날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 기억이 불쑥 떠오른 건, 패스트 라이브즈(2023)를 보다가 해성과 노라가 뉴욕 술집에서 나란히 ..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매슈 매코너헤이 주연의 2014년 SF 드라마.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 웜홀을 통과하는 우주 탐험을 배경으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물리적 힘이 될 수 있다는 질문을 거대한 화면과 파이프 오르간 선율로 풀어낸다.당신은 혹시 우주가 아니라 가족 때문에 운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SF 영화에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2025년 야간 배차를 마치고 귀가하던 밤, 작은아들이 카카오톡으로 링크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아버지, 이거 한 번은 봐야 해요." 솔직히 첫 반응은 '60 넘은 사람이 무슨 우주 영화냐'였습니다. 그런데 주인공 쿠퍼가 황토 먼지 날리는 옥수수밭을 가로지르는 첫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등받이에서 몸을 앞으로 당겼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2023년 연출한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이론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킬리언 머피가 연기한 전기 드라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7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과학적 성취와 도덕적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을 묵직하게 파고드는 작품이다.당신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나라를 위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명분들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안 된다"라고 말하기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이 옵니다. 《오펜하이머》는 바로 그 지점에 선 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저는 이 영화를 퇴근 후 밤 열한 시쯤 소파에 앉아 틀었습니다. 하루 열두 시간 가까이..
조선호 감독, 홍경·노윤서·김민주 주연의 2024년 한국 로맨스·멜로 영화 〈청설〉은 2009년 대만 동명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청각장애인 수영 선수와 도시락 배달 청년의 사랑을 한국 수어로 담아냈다. 말 대신 손짓과 눈빛으로 전하는 소통의 본질을 청량한 초여름 색감 속에 섬세하게 풀어낸다.지난달 버스를 몰던 중에 있었던 일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노원 방면 노선을 운행하던 오후 2시 무렵,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 정류장에서 올라타셨는데 교통카드 단말기에서 오류음이 울렸습니다. 뒤에 승객 네댓 명이 줄을 서 있었고, 저는 반사적으로 "잔액 확인해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 입술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손을 귀 옆에서 살짝 흔드셨습니다. 저는 그제야 알아차렸습니다. 청각장..
존 M. 추 감독, 신시아 에리보·아리아나 그란데 주연의 2024년 뮤지컬 영화로, 브로드웨이 원작을 160분의 대형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입니다. '착한 마녀'와 '나쁜 마녀'의 반전된 시선으로 편견과 우정,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며, 전 세계 박스오피스 7억 5천만 달러를 돌파한 2024년 최대 화제작입니다.당신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한 적 있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길을 걸어간 적은요? 영화 《위키드》를 보고 나서 며칠째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습니다초록빛 편견이 만든 두 마녀의 온도차엘파바(신시아 에리보)는 초록 피부 하나만으로 태어날 때부터 낙인이 찍힌 존재입니다. 오즈 시즈 대학교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강..
〈화란〉(2023)은 김창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탈출구 없는 마을에서 살아남으려는 17세 소년 연규(홍사빈)와 이미 범죄 세계의 일부가 된 치건(송중기)의 이야기를 124분 동안 밀도 높게 담아낸 한국 누아르 드라마다. 화려한 액션 없이 인물의 눈빛과 침묵만으로 절망을 쌓아 올리는 연출이 이 영화를 다른 누아르와 구별 짓는 핵심이다.오늘 아침 회사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서 40분을 뛰다가 문득 〈화란〉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허리 강화 운동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는데, 작년 이맘때만 해도 허리가 아파 제대로 서지도 못했던 내가 지금은 턱걸이 10개를 넘기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꾸준함이 방향이 된다는 것, 이 영화는 그 반대편을 보여준다. 방향을 잃은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