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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설

    조선호 감독, 홍경·노윤서·김민주 주연의 2024년 한국 로맨스·멜로 영화 〈청설〉은 2009년 대만 동명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청각장애인 수영 선수와 도시락 배달 청년의 사랑을 한국 수어로 담아냈다. 말 대신 손짓과 눈빛으로 전하는 소통의 본질을 청량한 초여름 색감 속에 섬세하게 풀어낸다.
    지난달 버스를 몰던 중에 있었던 일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노원 방면 노선을 운행하던 오후 2시 무렵,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 정류장에서 올라타셨는데 교통카드 단말기에서 오류음이 울렸습니다. 뒤에 승객 네댓 명이 줄을 서 있었고, 저는 반사적으로 "잔액 확인해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 입술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손을 귀 옆에서 살짝 흔드셨습니다. 저는 그제야 알아차렸습니다. 청각장애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단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지갑 모양으로 손을 폈다 오므렸습니다. 그분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시고 지갑에서 현금 1,200원을 꺼내 내미셨습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통했습니다. 그날 차고지에 들어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매일 수백 명과 마주치는데, 과연 몇 명이나 제대로 들었던가.' 〈청설〉을 보고 나서 그 버스 안 장면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서툰 손끝이 닿은 자리에서 소통은 시작됐다

    홍경이 연기한 용준은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의 말은 자꾸 막힙니다. 여름(노윤서) 앞에 서면 입이 아니라 손이 먼저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홍경은 수어를 3개월가량 배웠는데, 세 배우 중 노윤서와 김민주가 더 빠르게 습득했다고 합니다. 수어교육원에 못 가는 날에는 연습실을 따로 잡아 연습했다는 이야기가 그냥 홍보 멘트로 들리지 않는 건, 그 서툶이 스크린 위에서 그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능숙하지 않아서 손끝이 떨리고, 표정이 더 간절해지고, 눈빛이 더 오래 상대를 붙잡습니다. 서툶이 곧 진심이 된 셈입니다. 홍경 본인도 처음에는 원작 리메이크라는 점이 부담스러웠다고 했는데, 결국 순수함 때문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건 용준이 여름에게 어설픈 수어로 처음 말을 거는 장면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2004년 산동성 칭다오 공장에 처음 부임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중국어를 거의 못 하던 저는 현지 작업반장 왕 씨의 말을 첫 주간 회의에서 30%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쯤 지나자 말이 아니라 그의 눈빛과 손짓으로 현장 분위기를 읽게 됐습니다. 불량률이 오르는 날에는 왕 씨가 회의 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허리 뒤로 모았고, 라인이 잘 돌아가는 날에는 무릎을 가볍게 손으로 쳤습니다. 말보다 몸이 먼저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중국어가 제법 늘었을 때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왕 씨가 껄껄 웃으며 "라오반(老板), 저도 처음엔 팀장님 눈으로만 판단했어요"라고 했습니다. 8년 주재원 생활 동안 저는 언어보다 눈빛이 더 솔직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용준이 수어도 모르면서 여름에게 먼저 다가가는 장면이 낯설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조선호 감독이 실제 청각장애인들을 인터뷰하며 취재한 과정도 이 영화에 중요한 질감을 입혔습니다. 클럽에서 표정과 리듬감으로 춤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 장면을 연출에 반영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가을(김민주)이 클럽에서 진동으로 음악을 느끼며 춤추는 장면이 단순한 감동 코드로 소비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실제 누군가의 이야기'라는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누군가와 말없이 완벽하게 통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소리 없이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저는 오른쪽 귀에 난청이 있습니다. 버스 운전을 시작한 2019년 무렵부터 오른편 소리가 뭉개지듯 들렸고, 병원에서는 소음성 난청 초기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회사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다가 오른쪽 이어폰으로만 음악을 들어봤습니다. 노래가 들리긴 하는데 솜을 댄 것처럼 뭉툭하고 멀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소리를 잃어간다는 것'이 실감 났습니다.

    〈청설〉을 보고 나서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영화의 음향 설계는 역설적입니다. '청각 중심의 연출'이라 했는데,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들이 오히려 관객에게 평소 흘려듣던 일상의 소리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새소리, 물소리, 발소리.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바깥소리가 다르게 들립니다. 요즘 저는 러닝머신 위에서 두 귀가 멀쩡히 듣는 음악 한 곡에도 작게 감사합니다.

    색채 선택도 인상적입니다. 초여름 수영장의 물빛, 햇살 아래 공원의 풀빛, 선명한 녹색과 파란색 계열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이 색들은 청각장애를 어둡고 무거운 서사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감독의 선언처럼 읽힙니다. 밝고 청량하게 가져가되, 그 안에서 인물들이 겪는 소통의 간극은 조용히, 그러나 깊이 담아냈습니다. 카메라는 자꾸 손을 클로즈업합니다. 얼굴보다 손이 먼저 나옵니다. 우리가 평소 얼마나 손의 언어를 무시하며 살아왔는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구도입니다.

    제목 청설(聽說)은 '들을 청(聽), 말씀 설(說)'입니다. 진정으로 듣고 말한다는 뜻인데, 이 영화는 그 질문을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던집니다. 우리는 귀가 멀쩡해도 얼마나 많은 말을 흘려들었는지. 버스 안에서 수백 명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듣지 않았던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2025년 12월 21일, 저는 40년 넘게 피워온 담배를 끊었습니다. 중학교 때 시골 밭두렁에서 친구가 건넨 담배 한 개비로 시작해서, 칭다오 공장 야근 때 한 갑, 사업이 기울던 2018년에는 하루 두 갑을 피운 날도 있었습니다. 금연을 선언했을 때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눈으로 저를 봤습니다. 그 눈빛 하나가 어떤 말보다 무거웠습니다. 말이 없어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걸, 저는 그날 다시 배웠습니다. 〈청설〉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가장 중요한 말을 소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전달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의 손짓과 눈빛을 오늘 제대로 읽고 있으신가요?

    별점: ★★★★☆ (4.5/5)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가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용준과 여름의 감정이 깊어지는 중반부 호흡이 다소 빠르게 처리되어, 두 사람이 왜 서로에게 끌렸는지를 관객이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이미 사랑에 빠져 있는 느낌이 듭니다. 갈등 국면도 예상 가능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값진 건, 장애를 감동 소비재로 다루지 않고 소통의 본질 자체를 질문으로 던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수어를 처음 접해보고 싶은 분
    말보다 눈빛이 더 솔직했던 관계를 기억하는 분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잠시 조용하고 청량한 화면을 원하는 분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극장보다는 편안한 저녁 시간에 집에서 천천히 보시길 권합니다. 2024년 한국 로맨스 중 가장 조용하고, 그래서 가장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총평 및 관람 포인트

    오른쪽 귀 난청을 안고 매일 버스를 모는 저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었습니다. 소리를 잃어가면서도 소통은 더 선명해질 수 있다는 것, 8년 중국 주재원 생활에서 언어 없이 왕 씨와 눈빛으로 현장을 읽던 경험이 스크린 위에서 다시 펼쳐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관람 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손의 클로즈업 장면들입니다. 카메라가 얼굴 대신 손을 먼저 잡을 때마다, 그 손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가 왜 청설(聽說)이라는 제목을 달았는지 저절로 이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