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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는 플러스 사이즈를 입니다
    악마는 플러스 사이즈을입니다

    새벽 첫차를 몰고 나가기 전, 휴대폰으로 짧은 영상 하나를 봤습니다. 개그우먼 이수지가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에 올린 콩트, 《악마는 플러스 사이즈를 입는다》였습니다. 정식 개봉 영화가 아니라 2006년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코믹하게 비튼 패러디 콩트라는 걸 알고 봤는데도, 저는 이 짧은 영상에서 꽤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버스 차고지에서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5분짜리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습니다. 그럴 만큼 짧은 시간에 담긴 게 많았습니다.

    메릴 스트립쇼가 비춘 이수지의 진짜 얼굴

    이수지는 패션 잡지사 편집장 "메릴 스트립쇼" 역을 맡아, 배가 고프면 성격이 돌변하는 상사를 연기합니다. 카리스마 대신 오직 간식에 집착하는 설정으로 웃음을 유발하는데, 그 과장된 코미디 안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습니다. 성과에 쫓겨 예민해지고, 작은 것에도 날카로워지는 상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1984년 대기업에 입사해서 생산관리 업무를 맡았을 때, 실적 압박에 짓눌려 후배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원가절감 목표를 못 채운 날엔 퇴근길 버스 안에서도 숫자만 곱씹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일 잘하는 태도"라고 착각했습니다.

    이후 중국 산동성에서 8년간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도 비슷한 패턴이 이어졌습니다. 실적 보고 하루 전날엔 잠을 설쳤고, 현지 직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깐깐하게 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저희 집 두 아들은 로컬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퇴근하고도 표정이 안 풀린 채 집에 들어가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제 눈치를 보던 그 무렵의 표정이, 이 영상 속 편집장 밑에서 눈치 보는 직원들 모습과 정확히 겹쳐 보였습니다. 그때는 그게 가장의 무게라고만 생각했지, 아이들에게 어떤 표정으로 남고 있는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지무비의 내레이션이 만든 진짜 같은 가짜

    이 콩트가 화제가 된 데는 구독자 398만의 영화 리뷰 유튜버 지무비의 참여가 컸습니다. 실제 영화 리뷰 형식을 그대로 가져온 내레이션이 붙으면서, 콩트는 정말 그럴듯한 "영화 리뷰 영상"처럼 완성됐습니다. 댓글에는 "해당 영화는 극장에서 영원히 관람하실 수 없다"는 반응까지 달렸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재미있었습니다. 형식만 갖추면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는다는 것. 저도 중국에서 MRO 사업을 정리하고 2019년 한국으로 돌아와 버스 운전을 시작했을 때, 겉으로 "번듯한 자리"가 아니어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노선을 도는 것 자체가 저를 다시 신뢰할 수 있게 만든 형식이었습니다.

    저는 배우자가 1999년 위암을 이겨낸 뒤로, 겉모습이 그럴듯한 것과 실제로 버티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병원 대기실에서 다른 환자들과 마주칠 때마다, 겉으로는 다 비슷하게 아파 보였지만 각자 버티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배우자는 그 시기를 요양보호사·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바꿔냈습니다. 형식만 갖춘 콩트 속 영화가 진짜처럼 느껴지듯, 겉으로 힘든 시기도 그 안에서 무엇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시간이 된다는 걸 배우자를 보며 배웠습니다.

    첫 출근 날, 차고지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느꼈던 그 어색함이 아직 생생합니다. 대기업 관리자에서 버스 기사로, 남들 눈엔 내려온 것처럼 보였겠지만, 저는 그 반복되는 노선과 시간표가 오히려 저를 다잡아주는 틀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무비의 진지한 내레이션처럼, 반복되는 형식이 결국 진짜 무게를 만든다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숨 고르기 5년 차, 그 정직한 이력서

    콩트 속 지원자 캐릭터는 경력란에 당당히 "숨 고르기 5년 차"라고 적어냅니다. 처음엔 웃겼지만, 저는 이 대사가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10년 전 사기와 주식 리딩 피해로 무너진 뒤, 저에게도 몇 년의 "숨 고르기"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이력서에 못 넣을 공백으로만 여겼는데, 이 캐릭터는 그걸 당당한 한 줄로, 부끄러움 하나 없이 이력서 맨 위에 써넣어 버렸습니다.

    쿠팡과 배민 배달 알바를 오가던 시절, 저는 그 일들을 "임시로 버티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누가 물어보면 얼버무리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배달 노선 하나하나가 지금의 버스 노선을 도는 저를 만든 훈련이었습니다.

    2024년 10월부터 매일 헬스장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처음 몇 달은 런닝머신 위에서 숨만 헐떡이다 내려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였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틀을 반복하다 보니 허리 통증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콩트 속 지원자의 숨 고르기 5년 차처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반복이 사실은 가장 확실한 변화의 방식이라는 걸 몸으로 확인한 셈입니다.

    2023년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2024년 세례를 받으면서, 저는 이 "숨 고르기"가 부끄러운 공백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성공의 편집장 자리에 있든, 숨 고르는 지원자 자리에 있든, 결국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평 및 관람 포인트

    정식 영화가 아닌 5분짜리 콩트에 이렇게 곱씹을 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고, 제가 "숨 고르던 시절"을 이력서에서 지우려고만 했던 게 오히려 손해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성과에 쫓겨 날을 세우던 예전의 저와, 지금 담담히 버스를 모는 저 중 어느 쪽이 더 저다운 사람인지 되묻게 만드는 영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