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분짜리 영화가 이렇게 오래 머무를 줄은 몰랐습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소개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봤는데, 막상 틀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새벽이었는데, 그 통증도 한동안 잊었습니다."반복되는 일상"이 균열을 숨긴다반복되는 일상은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게 함정이다.2004년 처음 상하이에 발령받았을 때, 저는 매일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숙소에서 사무실까지, 사무실에서 식당까지. 몇 달이 지나자 그 길이 너무 익숙해져서 오히려 이상한 날에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어느 날 평소 가던 골목이 공사로 막혀 있었는데, 저는 그걸 한 블록 지나쳐서야 알아챘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너무 익숙해지면 오히려 눈이 닫힌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8번 ..
새벽 첫차를 몰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핸들을 잡고 있는 내가, 대기업 사원증을 달고 중국 출장 비행기를 탔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던 어느 날 밤, 오래된 DVD 케이스를 꺼냈습니다. 1996년 노라 애프론 감독의 영화 《마이클》이었습니다.결함 속에 숨겨진 신성의 역설영화 속 마이클(존 트라볼타)은 천사입니다. 하지만 이 천사는 담배를 물고, 파이를 탐하고, 여자를 밝힙니다. 날개는 달려 있지만 깃털은 지저분하고 몸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게 천사 맞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 5분쯤 지나고 나니 오히려 그게 위로였습니다.마이클이라는 캐릭터는 아이러니의 교과서 같은 사례입니다. 그가 거룩하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게..
《정보원(The Informer)》(2019)은 안드레아 디 스테파노 감독이 연출한 범죄 스릴러로, FBI와 마약 카르텔 사이에서 이중 스파이로 살아가는 전과자 피트 코스타(조엘 키나만)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114분 분량이며, 로사문드 파이크·클라이브 오웬·아나 데 아르마스가 함께 출연했습니다.새벽 4시, 핸들을 잡기 전에 잠깐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다 보고 나서 한참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무언가 건드려진 게 있었는데, 그게 뭔지 정리가 안 됐습니다. 며칠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영화가 첩보물처럼 생겼지만 실은 다른 걸 묻고 있더라고요. 국가와 시스템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질문이 제 안에서 오래된 기억 하나를 건드렸던 겁..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너무 어렵다"는 인상만 남았습니다. 대사도 없고, 설명도 없고, 화면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새벽 네 시 반에 첫차를 몰고 나가면서 갑자기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텅 빈 도로, 아무도 없는 루브르의 복도, 그리고 그 안에서 혼자 서 있는 이강생의 뒷모습. 그제야 알았습니다. 이 영화는 설명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나는 멈췄다"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말은, 어떤 언어로도 충분히 담기지 않습니다. 차이밍량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저는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갔습니다...
서울 새벽 거리를 수백 명의 승객과 함께 달린 뒤 집에 돌아오면, 머리를 비우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날 넷플릭스에서 선택한 영화가 바로 《레드 노티스》였습니다. 화려한 액션과 끊임없는 반전, 그리고 세 배우의 뛰어난 호흡이 피로를 잊게 만들었습니다.반전과 케미, 이 영화가 90%의 관객을 사로잡은 이유《레드 노티스》는 인터폴의 최고 수배 등급을 뜻하는 '레드 노티스'를 소재로 한 글로벌 액션 코미디입니다. FBI 프로파일러인 존 하틀리는 전설적인 미술품 도둑 놀런 부스를 쫓다가 오히려 누명을 쓰고 레드 노티스 수배자가 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바로 이 설정이 영화 전체를 끌어가는 핵심 동력입니다. 두 사람은 진짜 범인인 비숍을 잡기 위해 손을 잡고, 클레오파트라의 황금 알 세 개를 둘러싼 추..
2004년부터 7년간 중국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공항 보안 검색대를 수십 번 통과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줄 서서 가방 올리고 벨트 풀고 통과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 검색대 직원이 어떤 마음으로 거기 서 있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뒤늦게 미안해졌습니다.공항이라는 무대가 만들어내는 밀폐감《캐리온》은 크리스마스이브의 LA 국제공항(LAX)을 배경으로 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날, 수십만 명이 귀향을 위해 몰려드는 공간. 영화는 이 혼잡함을 단순한 배경으로 쓰지 않습니다. 자우메 콜렛세라 감독은 공항이라는 공간의 특수성, 즉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올 수 없고, 모든 이동이 감시되며, 예외 없이 검색을 받아야 하는 그 통제된 구조 자체를 압박 도구로 씁니다.TSA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