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처음 중국 땅을 밟던 날 저는 언어도 얼굴도 낯선 대륙 한복판에 혼자 서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새벽 버스 핸들을 잡고 텅 빈 서울 도심을 달리는 제가 라 그라지아를 보며 그 감각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찔렸습니다.고독은 무너짐이 아닌 고요한 저항이다라 그라지아는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들판을 배경으로, 마을 공동체 안에서 철저히 투명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공 카리나 체르노수토바가 연기하는 인물은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이 나약함이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자기 보존의 방식이라는 것을 영화는 아주 천천히 드러냅니다.이 영화를 보다가 저는 2013년 이후 몇 해를 떠올렸습니다. MRO 사업이..
새벽 첫차를 몰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핸들을 잡고 있는 내가, 대기업 사원증을 달고 중국 출장 비행기를 탔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던 어느 날 밤, 오래된 DVD 케이스를 꺼냈습니다. 1996년 노라 애프론 감독의 영화 《마이클》이었습니다.결함 속에 숨겨진 신성의 역설영화 속 마이클(존 트라볼타)은 천사입니다. 하지만 이 천사는 담배를 물고, 파이를 탐하고, 여자를 밝힙니다. 날개는 달려 있지만 깃털은 지저분하고 몸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게 천사 맞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 5분쯤 지나고 나니 오히려 그게 위로였습니다.여기서 캐릭터 아이러니(character irony)란 인물이 기대되는 역할과 정반대의 속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