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반, 첫 차 시동을 걸 때마다 저는 잠깐 멍해집니다. 허리가 뻐근하고 귀 한쪽은 늘 먹먹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도시가 저 혼자인 것 같은 이상한 평온이 있습니다. 그날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네 시간도 채 못 자고 일어나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피곤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잠이 완전히 달아났습니다《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2023)》는 조셉 쿤 감독이 연출한 SF 스릴러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화제를 모은 작품입니다. 근미래 미국을 배경으로, AI 기술과 클론 기술이 완전히 상용화된 세계에서 K-팝 스타의 복제 클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체성과 소유권 분쟁을 다룹니다. 브라이언 타 이리 헨리, 에반 레이철 우드, 스티브 연이 출연하며, 영화..
공포 영화를 보고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화면 속 귀신이 아니라, 영화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서울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저에게 새벽 도로는 영화보다 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서울 시내버스를 운전한 지 벌써 몇 해가 지났습니다. 자정이 넘은 도로는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가로등이 끊어지는 구간,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텅 빈 좌석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무언가 있는 것 같은 느낌. 두려움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익숙하고, 평온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이상한 그 감각 말입니다. 이상민 감독의 신작, 2026년 4월 8일 개봉 예정인 이 한국 공포 영화를 기다리면서 저는 자꾸 그 새벽 도로가 겹쳐 보입니다. 운전석에 홀로 앉아 정류장을 지나갈 때면 유리창에 비친 제 모..
처음에는 흔한 청춘 스포츠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전국대회 우승을 향해 달려가는 익숙한 이야기일 거라 예상했지요. 그런데 새벽 버스 운행을 마치고 우연히 보기 시작한 《리바운드》는 제 예상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리바운드》는 2012년 실제 부산 중앙고 농구부 이야기입니다. 전국대회 상위권은커녕 동네에서도 이기기 힘들었던 만년 꼴찌 팀이, 갑자기 부임한 신인 코치와 함께 전국 4강까지 올라간 실화입니다. 감독은 장항준, 주연은 안재홍이 코치 역할을 맡았고, 나머지 선수들은 신인 혹은 비전문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2023 대종상에서 이신영이 신인남우상을 수상했을 만큼, 연기의 결도 예상보다 훨씬 깊었습니다.침묵이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할 때저는 새벽에 버스를 몹니다. 손님이 없는 구간, 아무 말도 ..
2026년 4월, 극장에서 끝장수사를 보고 나오는 길에 잠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7년이라는 시간이 이 영화를 망가뜨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재혁이라는 캐릭터가 제 삶의 어떤 구간과 겹쳐 보인다는 낯선 감각이 동시에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버스 운전석에 앉아 창밖을 보다 보면 억울하게 꺾인 사람들의 얼굴을 가끔 발견합니다. 재혁이 딱 그 얼굴이었습니다.7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영화끝장수사는 창고 영화(완성은 됐지만 개봉하지 못하고 배급사 창고에 묶인 영화를 뜻하는 업계 용어)라는 꼬리표를 달고 극장에 왔습니다. 2019년 촬영을 마쳤으나 주연 배우의 음주운전 사건과 코로나19 팬데믹이 겹치면서 7년을 떠돌았고, 21세기 한국 상업영화 가운데 개봉이 가장 오래 밀린 기록을 세웠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충성과 권력, 인간의 선택을 깊이 있게 그려낸 궁중 드라마입니다.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의 묵직한 연기와 장항준 감독의 연출, 그리고 실제 버스기사인 필자의 경험을 함께 담아 작품의 의미를 리뷰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왕 곁에서 살아가는 한 인물을 통해 권력의 중심이 아닌 주변인의 삶을 조명하는 시대극입니다. 화려한 정치극보다 인간관계와 심리 변화에 집중하며, 충성과 희생의 의미를 깊이 있게 질문하는 작품입니다.충성스러운 사람이 늘 보상받는다고 믿으십니까? 저는 오래전에 그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장항준 감독이 연출한 2026년 조선시대 궁중 드라마입..
극장을 나오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분노인지 허탈함인지 구분이 안 되는 감정이 가슴 한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1,300만 명이 이 영화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 극장 안에 앉아 있는 동안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습니다.1979년 12월 12일의 반란, 9시간 동안 무너진 국가의 질서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영화는 그 9시간을 141분 안에 압축해 넣었습니다. 군사반란(쿠데타·coup d'état,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행위)이라는 단어를 역사 교과서에서 읽었을 때와, 스크린 위에서 그 장면들을 눈으로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저는 그날 밤을 중학생으로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어른들이 라디오 앞에 심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