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운전을 하다 보면 거울 속 얼굴들이 책 보다 많은 걸 가르쳐 줍니다. 어느 날 종점에서 한숨을 삼키던 중년 신사,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교복 차림의 학생. 저는 운전대를 잡으면서 늘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전쟁 중일까. 영화 〈나폴레옹〉을 보고 난 뒤, 그 생각이 더 깊어졌습니다. 유럽 대륙을 손에 쥔 황제도 결국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니까요.결핍의 눈빛으로 유럽을 호령한 황제의 두 얼굴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나폴레옹은 제가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영웅의 위엄보다 결핍의 냄새가 먼저 났습니다. 피닉스는 나폴레옹의 눈빛을 시종일관 불안하게 유지합니다. 전장에서 말을 타고 호령할 때조차 그 눈 안에는 어딘가 인정받지 못한 아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
1990년대 초반, 지지직거리는 VHS 테이프로 이 영화를 처음 봤습니다. 화면이 끊길 때마다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스물몇 살의 신입사원으로, 세상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는 곳이라 믿고 있었습니다.국가의 명령은 복종을 당연히 요구한다영화 《마루타》(1988)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 관동군 731부대가 중국 하얼빈 인근에서 자행한 생체실험을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재현한 작품입니다. 감독 무 떵페이는 극영화와 실제 기록 영상을 혼합하는 혼성 다큐드라마 형식을 택했는데, 여기서 혼성 다큐드라마란 극적 연출과 실제 자료 화면을 교차 편집해 사실감을 극대화하는 연출 방식을 의미합니다.저를 오래도록 불편하게 만든 장면은 잔혹한 실험 장면 그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