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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는프라다를 입는다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 메릴 스트립·앤 해서웨이 주연의 2006년 드라마 코미디 영화로, 패션 잡지 편집장 미란다 밑에서 살아남으려는 신입 앤디의 이야기를 통해 꿈과 타협, 직업적 성공과 자아 사이의 충돌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려낸다. 화려한 의상과 뉴욕 패션계의 냉혹한 이면을 동시에 담아낸 연출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 사람, 왜 저렇게 조용한데 무섭지?"라고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버스 운전을 하면서 그런 승객을 종종 봅니다. 한마디도 안 하는데 분위기가 달라지는 사람. 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미란다 프리스틀리가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더 무섭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미란다는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소리를 낮춥니다. 그 조용함이 고함보다 훨씬 날카롭게 꽂힙니다.

    1984년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을 때 저를 담당했던 부장님이 꼭 그런 분이었습니다. 회의실에서 실수를 지적할 때 절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천천히, 더 낮게 말씀하셨습니다. "박 씨, 이 숫자가 맞다고 생각해요?" 그 한 마디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미란다가 나이젤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한 뒤 앤디에게 "넌 나를 닮았어"라고 말하는 장면, 그 눈빛이 오래 머릿속에 남습니다. 승리인지 고독인지 구별이 안 되는 그 표정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밀리 블런트의 에밀리도 놓칠 수 없습니다. 파리 출장 자리를 앤디에게 빼앗기는 그 순간, 블런트의 얼굴에 배신감과 자기혐오가 동시에 지나갑니다. 대사 한 줄 없이 표정만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장면은, 조연이 주연을 압도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걸음걸이가 바뀌는 순간

    이 영화에서 앤디의 변화는 대사가 아니라 몸으로 먼저 드러납니다.

    초반 면접 장면에서 앤디는 두리번거립니다. 굽도 낮고, 걸음도 작고, 시선이 계속 흔들립니다. 그런데 중반 이후 하이힐을 신고 런웨이 사무실을 가로지르는 장면에서 그 걸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않습니다. 그 몸짓 하나로 내면의 변질을 보여주는 것, 앤 해서웨이의 연기에서 제가 가장 감탄한 부분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2019년 귀국 후 처음 4번 노선버스에 올라 운전석에 앉았을 때, 54세에 새로 시작하는 직업이 너무 낯설었습니다. 백미러 다섯 개를 한꺼번에 확인해야 하고, 정류장마다 정차 위치를 맞춰야 하고, 무릎 꿇듯 낮게 차를 세워야 승객이 편하게 탑니다. 처음 두 달은 매 정류장마다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손이 먼저 핸들을 꺾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익숙해진 것입니다. 앤디의 걸음걸이 변화가 단순한 패션의 적응이 아니라, 그 환경에 몸이 먼저 굴복해 버린 신호라는 것을, 저는 그날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하시는 일에서 어느 순간 "몸이 먼저 알았다"는 경험을 해보셨나요?

    조직 논리가 정을 밀어낼 때

    미란다가 나이젤을 이용하는 장면, 그리고 앤디가 에밀리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는 구조가 이 영화의 가장 불편한 핵심입니다. 영화는 그것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게 불가피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더 씁쓸합니다.

    2004년 웨이하이 공장 관리책임자로 부임한 첫 해, 현지 직원 500여명을 관리하면서 본사에서 야간 팩스가 날아오는 건 예사였습니다. "내일 오전 8시까지 이번 달 원가절감 실적 보고서 제출." 중국과 한국 시차는 한 시간뿐인데, 그 한 시간이 밤샘을 의미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웨이하이 공장에서 현지 반장 왕 씨를 실적 부진으로 교체해야 하는 본사 지시를 받은 날이 있었습니다. 8년을 함께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혼자 공장 뒤편에서 담배를 두 개비 연달아 피웠습니다. 조직의 논리를 따르면서도 그게 옳다고 느끼지 못하는 그 불편함, 미란다가 나이젤을 내보내는 장면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이유입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지금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그 질문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무거워졌습니다.

    분수대 앞에서 던진 것들

    많은 분들이 앤디의 분수대 장면을 통쾌하다고 하십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10여 년 전 주식 리딩 사기와 지인 보증 사기로 큰 손실을 입었을 때, 저도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배우자가 곁에 있었고, 두 아들을 중국 로컬학교에 보내며 키워야 했습니다. 앤디는 던지고 나서 새 출발을 했지만, 저는 던지는 대신 새벽 4시 쿠팡 배달 핸들을 잡았습니다. 한강변을 달리며 "이게 맞는 길인가" 되물었던 날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은 건, 앤디가 분수대 앞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앞만 보자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2025년 12월 21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25년 넘게 피워온 담배를 내려놓은 날도 그런 다짐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는 헬스장 러닝머신에서 매일 1시간 이상 뜁니다. 2024년 10월부터 시작했는데, 처음엔 20분도 버티지 못했습니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통증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미란다가 흰머리를 감추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저도 통증을 피하지 않고 매일 그 자리에 섰습니다. 지금은 허리가 많이 나아졌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던지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 던지는 것도 용기지만, 내려놓지 않는 것도 용기입니다.

    이 영화가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패션 때문이 아닙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한 번쯤 "나는 지금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를 물어봐야 하는 순간이 오고, 그 질문을 이렇게 세련된 방식으로 던지는 영화가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60대에 블로그를 시작하고, 버스 핸들을 잡고, 담배를 끊고, 러닝머신 위에서 허리를 펴고 있는 저에게, 앤디의 선택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기억하고 되찾으려는 모든 분들께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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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점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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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평 및 관람 포인트

    중국 15년 동안 조직의 논리를 따르며 살았고, 귀국 후에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저에게 이 영화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미란다의 냉혹함을 비판하기 전에,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먼저 물어보는 것이 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앤디의 분수대 장면보다 미란다가 홀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을 더 오래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