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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년

    2012년 개봉한 강풀 웹툰 원작 영화 《26년》은 조근현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진구·한혜진·이경영이 출연한 역사 스릴러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26년이 지나도록 처벌받지 않은 학살 책임자를 피해자 유가족들이 직접 심판하려는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적 공간을 그대로 화면에 담아낸 미술감독 출신 감독의 절제된 연출이 인상적이며, 정의와 복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본 작품이다.

    새벽 4시 반, 서울 시내버스 차고지 휴게실 형광등이 혼자 켜져 있었습니다.

    출근 대기 시간이 남아 있었고, 저는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26년》, 2012년에 개봉했을 때 저는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에서 MRO 사업 거래처 전화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창고를 개조한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서류를 뒤지던 시절이라 영화 한 편 볼 여유가 없었고, 한국 소식은 늦게 닿았습니다. 그러다 10여 년이 지나 버스 운전기사가 된 60대 초반에 이 영화를 처음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첫 장면이 시작되고 군홧발 소리와 민간인 비명이 교차하는 순간, 저는 열다섯 살 강원도 시골 소년이었던 1980년 여름으로 잠깐 끌려갔습니다. 담배 잎을 따던 그 여름, 어른들이 라디오 앞에 모여 "쉿, 애들은 저리 가라" 하시던 장면이 어렴풋이 겹쳤습니다. 그때 저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차고지 휴게실에서야, 그 '모름'이 부끄럽고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26년이 지워도 남는 탄흔의 무게

    이 영화가 다른 역사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전일빌딩 옥상 장면이 그 핵심입니다. 카메라가 천천히 구 전남도청을 향할 때, 헬기 사격으로 남겨진 탄흔이 화면 가장자리에 스치듯 잡힙니다. 감독은 자막도, 내레이션도 넣지 않았습니다. 그냥 거기 두었습니다.

    조근현 감독이 미술감독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세트를 짓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새긴 상처를 그대로 화면에 담는 방식을 택했고, 어떤 대사보다 그 탄흔 하나가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전일빌딩은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하기 전부터 광주의 살아 있는 증거로 기능해 온 공간입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링크)

    조명도 의도적입니다. 1980년 과거 회상 장면은 자연광처럼 거칠고 뜨겁습니다. 반면 2006년 현재의 음모 장면은 차갑고 인공적인 빛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살아 있던 빛이 26년 만에 차갑게 식어버린 세계 조명 하나로 그 온도 차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저는 이 연출 방식을 보면서 1984년 대기업 공채 시절 생산관리 업무가 떠올랐습니다. 공장합리화 운동을 추진할 때 배운 원칙 중 하나가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데이터로 보여줘라"였습니다. 이 영화의 공간 연출이 그 원칙과 닮아 있습니다. 설명 없이 현장이 말하게 하는 것. 어떤 웅변보다 탄흔 하나가 더 정직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사망자는 공식 집계 기준 165명이며, 부상자는 3,139명에 달합니다.(출처: 5·18 기념재단, 링크) 영화 속 숫자가 아닙니다. 이 숫자들이 26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이유가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침묵으로 말하는 배우들의 눈빛

    진구가 연기한 곽진배는 말이 적습니다. 그러나 말이 없는 만큼 몸이 많이 말합니다. 꽉 다문 턱, 손에 힘이 들어가는 찰나, 말을 하다 멈추는 0.5초의 호흡 저는 그 침묵의 연기에서 오히려 더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어른이 된 남자의 눈 속에는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있는데, 진구는 그것을 폭발시키지 않고 눌러 담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터지지 않아서 더 무겁습니다.

    당신은 오래 참아온 감정이 갑자기 뚜껑이 열릴 뻔한 순간을 경험한 적 있습니까?

    한혜진이 연기한 심미진은 국가대표 사격선수라는 설정이 단순한 직업 배경이 아닙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이 흔들리면 안 되는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는 장면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와 살인 사이의 경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녀의 표정이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총을 잘 쏜다는 것과 사람을 향해 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을, 한혜진은 대사 없이 보여줍니다.

    이경영이 연기한 김갑 세는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연기입니다. 대놓고 악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태연하고 침착하며 심지어 품위 있어 보입니다. 역사의 죄인이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경영의 연기는 그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들이밉니다. 저는 이 캐릭터를 보면서 2016년 웨이하이에서 제가 당한 일이 겹쳤습니다. 10년 넘게 알고 지낸 거래처 대표에게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고 상품을 먼저 납품했다가 대금을 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부터 작정하고 접근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도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이국땅 사무실에서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던 그 밤, 배신당했다는 사실보다 내가 사람을 못 알아봤다는 자책이 더 오래 저를 괴롭혔습니다. 영화 속 팀원들이 "우리가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표정이, 그 밤의 제 얼굴과 겹쳐 보였습니다.

    복수가 정의가 될 수 없는 이유

    이 영화의 가장 불편한 질문은 여기 있습니다. 복수는 정의인가,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인가.

    팀 내부에 균열이 생기는 장면 김 가세 가 사실은 당시 계엄군이었다는 반전이 드러날 때, 저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불편한 것은 단순히 반전이 충격적이어서가 아닙니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이용하는 구조, 복수를 명분으로 또 다른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 그것이 역사의 반복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결국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복수가 완성되는지, 정의가 실현되는지 그 질문을 관객에게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어떤 관객에게는 이것이 불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열린 결말이 이 영화의 정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26년 전 시골 소년이었던 저는 라디오 소리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60대가 된 지금, 버스 운전을 마치고 차고지 형광등 아래서 이 영화를 보며 비로소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역사를 '과거의 사건'으로 봤는데, 지금은 달리 보입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몸속에 새겨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는 완성도가 고른 영화는 아닙니다. 편집 리듬(컷 전환의 속도와 장면 길이 조절)이 일관되지 않은 부분도 있고, 감독 데뷔작의 한계가 일부 장면에서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정직하려 한 태도, 공간을 증거로 활용한 연출의 진정성,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 이 세 가지는 오래 남습니다.

    역사적 책임과 개인의 복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야기에 공감하는 분, 1980년 그 여름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기억하는 분, 그리고 '정의'라는 단어의 무게를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본 분이라면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 (3/5)

    ❓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26년》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가요?
    A. 직접적인 실화는 아닙니다.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며,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가상의 복수 프로젝트를 그린 픽션입니다. 다만 영화에서 '그 사람'으로 지칭되는 인물이 실제 역사적 인물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개봉 당시 논란과 함께 많은 사회적 관심을 받았습니다.

    Q. 영화 《26년》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A. 복수 프로젝트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팀이 무너지면서 계획은 완전한 성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화는 명확한 카타르시스 대신 열린 결말을 선택하며, 복수가 과연 정의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돌려줍니다. 이 점이 일부 관객에게는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지만, 역사적 미완의 현실을 반영한 연출로 볼 수 있습니다.

    Q. 《26년》의 러닝타임과 관람 등급은 어떻게 되나요?
    A. 러닝타임은 135분이며, 15세 관람가입니다. 역사적 폭력 장면과 감정적으로 무거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어린 자녀와 함께 보기보다는 성인 관람을 권장합니다.

    Q. 전일빌딩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인가요?
    A. 네, 실제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건물입니다. 5·18 당시 계엄군 헬기가 민간인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는 탄흔이 발견된 역사적 현장으로, 현재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 공간을 실제 촬영 장소로 활용해 역사의 흔적을 스크린에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 함께 보면 좋은 영화

    • 택시운전사 —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른 시각에서 담아낸 작품으로,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면서도 평범한 개인이 역사의 현장에 휘말리는 방식을 그려 《26년》과 함께 보면 같은 사건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국제시장 —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되짚는 작품으로, 역사의 무게를 개인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방식이 《26년》과 맥을 같이 합니다.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