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버스를 몰고 차고지에 들어서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 걸까. 핸들을 잡은 손이 어느 순간 낯설어지는 그 감각 —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여전히 새벽을 달리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이상한 고요함입니다. 그날 밤, 퇴근 후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소파에 기대어 틀었던 영화 한 편이 바로 <호퍼스(Hoppers)>였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그 시간에 그 영화가 거기 있었고, 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줄거리를 한 줄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이름도 과거도 지운 채 LA의 밤 도로를 달리는 드라이버가, 우연히 위기에 처한 여성 아이렌과 얽히면서 자신이 가장 철저하게 숨겨왔던 것 — 감정, 연대, 인간에 대한 책임 — 을 끌어올리게 됩니다. 그 과정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폭발하거나 절규하지 않습니다. 드라이버는 내내 과묵하고, 그 침묵이 오히려 모든 것을 말합니다.
"새벽 운전대 위"에서 마주한 나 자신
새벽 네 시, 서울 시내버스 노선을 처음 출발할 때의 도로는 낮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공간입니다. 승객도 없고, 소음도 없고, 속도만 있습니다. 그 시간이 저는 솔직히 좋습니다. 아무도 저를 보지 않고, 저도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 짧은 구간이요.
<호퍼스>의 드라이버는 그 상태를 24시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영화 용어로 말하자면 미장센(mise-en-scène —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이 철저하게 그의 내면을 대신합니다. 좁은 차 안, 어두운 창밖, 계기판의 불빛. 감독은 인물의 심리를 대사 대신 공간으로 설명합니다. 저는 그 구도를 보면서 "아, 나도 저 안에 살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드라이버의 절제된 연기(restrained performance — 감정을 억누른 채 작은 동작과 눈빛으로 전달하는 방식)는 처음엔 차갑게 느껴집니다. 근데 한 장면, 한 장면 쌓이다 보면 그 냉기가 실은 방어막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면 무너진다는 걸 본인이 알기 때문에 참고 있는 겁니다.
주인공이 왜 그런 방식으로 살기로 했을까요. 저는 그게 선택이 아니라 학습된 생존법이라고 봤습니다. 중국에서 8년을 살면서 저도 비슷한 표정을 달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제가 배운 건 "웃지도 찡그리지도 말 것"이었습니다. 감정을 표시하면 빈틈이 보이거든요. 드라이버도 아마 그렇게 배웠을 겁니다.
고독은 도망칠 수 없을 때 가장 솔직해진다
2004년 처음 중국 베이징에 발을 디뎠을 때, 제가 가장 먼저 잃은 건 이름이었습니다. '박 부장'도, '아빠'도, '동생'도 아닌, 그냥 외국인 한 명이 되는 느낌. 그 도시는 저를 몰랐고, 저도 그 도시를 몰랐습니다. 처음엔 자유로운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무명성(無名性)이 꽤 무겁더군요.
드라이버가 LA를 배경으로 존재하는 방식이 딱 그랬습니다. 그는 내러티브(narrative —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구조) 안에서 의도적으로 이름이 지워진 인물입니다. 이름 없는 주인공은 영화 문법에서 흔히 관객의 투영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 장치는 좀 다르게 작동합니다. 그는 관객이 되고 싶은 존재가 아니라, 관객이 이미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은 모습입니다.
고독은 감추면 더 깊어집니다. 드라이버가 아이렌과 처음 마주치는 시퀀스에서, 그는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멈춘 건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게 누군가가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으로 봐주었기 때문이라고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기를 원했던 사람이, 처음으로 시선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 그 장면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중국에서 혼자 밥 먹던 날들, 아무도 한국어로 말 걸지 않는 저녁들 — 그때 누군가 제 쪽을 진짜로 봐줬다면 저도 멈췄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그 질문을 답하지 않은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그 공백이 이 작품의 가장 정직한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브텍스트(subtext — 대사나 행동의 표면 아래 숨겨진 진짜 의미)를 읽어내는 재미가 유독 큰 영화입니다. 대사가 적은 대신, 화면 안의 거리감과 시선 처리가 인물의 내면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이런 연출을 두고 영화 비평가들은 종종 '감정의 경제학'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 아끼면 아낄수록 터질 때 더 크게 울린다는 뜻이죠. <호퍼스>는 그 원칙을 끝까지 지킵니다.
"내려놓음"이 가장 강한 선택이 되는 순간
2023년 9월 28일,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나서 제 안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 '내려놓는 연습'입니다. 쥐고 있던 분노, 쥐고 있던 자존심, 쥐고 있던 계획들. 놓는다는 게 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날 이후로 조금씩 알아가는 중입니다. 그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훨씬 강한 일이더군요.
드라이버가 결말에서 아이렌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선택은, 영웅적 행동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는요. 그건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변해가는 내적 여정)의 완성이자, 그가 오랫동안 억눌러온 인간적 충동이 마침내 터지는 순간입니다. 멋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것밖에 남지 않아서 하는 행동.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내려놓음은 포기와 다릅니다.** 드라이버는 살고 싶지 않아서 뛰어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 한 사람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겁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그건 희생이고,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입니다. 어떤 언어로 불러도 그 무게는 같습니다.
저는 사회복지 현장에서 잠깐이나마 공부하면서, 인간이 가장 강해지는 순간이 언제인지 배웠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무언가를 위해 통제를 스스로 내려놓을 때였습니다. 드라이버의 결말은 그 이론이 필름 위에서 구현된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 — 감정의 정화, 극을 통해 쌓인 감정이 해소되는 경험)라는 말이 너무 식상하게 쓰일 때가 있는데, 이 장면에서만큼은 그 단어가 정확합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가슴이 한번 내려앉았다가 다시 올라왔습니다. 새벽 다섯 시 소파에서, 허리가 아프고 눈이 뻑뻑한 상태로 그 장면을 봤는데도 그랬습니다.
어떤 영화는 끝나고 나서 "좋았다"는 말이 먼저 나오고, 어떤 영화는 한동안 말이 안 나옵니다. <호퍼스>는 후자였습니다. 제가 리모컨을 집어 든 게 아니라 그냥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다음 분들께 특히 권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강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강한 것'을 혼동해 온 분
-혼자인 것과 외로운 것의 차이를 아직 구분 못하고 있는 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내던진 적이 있거나, 그러고 싶었던 적이 있는 분
말이 많지 않아도, 화면이 화려하지 않아도 — 영화가 이렇게 사람을 오래 붙잡을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시간이었습니다.
"침묵도 언어다. 고독도 선택이다. 그리고 내려놓음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