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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운대
    해운대

    버스 운행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해운대》 후반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2019년 무렵이었습니다. 중국 15년을 접고 MRO 사업도 실패로 끝난 뒤였고, 사기 피해로 통장은 바닥이었습니다. 리모컨을 내려놓은 것은 설경구가 파도 속에서도 연희의 손을 놓지 않으려던 그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손을 잡는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래도 손을 놓지 않는 그 마음. 그날 밤 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죄책감을 품은 채 10년을 버텨온 설경구의 눈빛

    설경구 씨가 연기한 최만식은 겉으로는 해운대 상가번영회를 자처하는 허풍쟁이 백수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연희 아버지를 2004년 인도양 쓰나미에서 잃었다는 죄책감이 10년 넘게 곪아 있습니다. 설경구 씨의 탁월함은 그 죄책감을 단 한 마디 대사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연희 앞에서 능청스럽게 웃다가도, 혼자 바다를 바라볼 때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그 전환. 프러포즈 장면에서 손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바지춤을 잡아당기던 어색한 몸짓이 어떤 화려한 고백보다 진실하게 보인 것은 그 이유에서 입니다.

    독자분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죄책감 때문에 마음을 숨겨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중국 웨이하이 공장에서 본사로부터 인원 감축 명단을 받아 든 날이었습니다. 서른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8년을 함께 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중국어를 더듬거릴 때 통역해 주던 왕(王) 씨, 야근하면 몰래 면발을 삶아 가져다주던 류(刘) 씨. 그날 밤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나 이거 못 하겠어." 아내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습니다. "오빠가 안 하면 누가 해요. 제대로 된 퇴직금이라도 챙겨주고, 얼굴 보고 얘기해 줘요."

    다음 날 아침 저는 한 명 한 명을 방으로 불러 직접 이야기했습니다. 통보가 아니라 사과를 했습니다. 파도는 피할 수 없었지만, 그 안에서 내가 붙들 수 있는 것은 붙들자고 생각했습니다. 만식이 그랬던 것처럼. 10년 전의 저라면 그 죄책감에 잠식당해 연희처럼 소중한 사람 앞에서도 계속 주저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무게를 안고서도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캐릭터의 성장 곡선이라는 연기 용어(배우가 극의 흐름에 따라 감정과 행동을 단계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를 적용하자면, 설경구 씨는 이 영화에서 죄책감 → 용기 → 상실 → 수용이라는 4단계를 120분 안에 군더더기 없이 완성해 냈습니다. 그것도 대사가 아니라 눈빛과 몸짓으로. 이것이 그를 한국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꼽는 이유입니다.

    파도보다 사람을 먼저 찾은 하지원의 한 순간

    하지원 씨가 연기한 강연희는 외유내강(外柔內剛,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강함)의 교과서입니다. 무허가 횟집을 혼자 꾸려가는 억척스러움이 있지만, 만식을 바라볼 때마다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면서 경계심이 풀리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면 이 영화의 절반을 놓치는 것입니다. 쓰나미가 몰려오는 공포 속에서 그녀의 눈이 파도보다 만식을 먼저 찾는 그 짧은 순간, 감독은 10년 치 감정을 단 하나의 눈빛으로 압축해 보여 줍니다.

    윤제균 감독은 부산 출신으로, 2004년 인도양 지진해일 당시 해운대에 있었습니다. "만약 100만 인파가 몰리는 피서철에 쓰나미가 닥친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해 구상부터 제작까지 5년을 들인 작품입니다. 감독이 의도한 것은 할리우드식 스펙터클(Spectacle, 시각적 장관 효과)이 아니라 사람 냄새나는 재난이었습니다. 실제로 영화 전체 러닝타임(Running time, 상영 시간) 120분 중 쓰나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후반 30분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0분은 철저히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카메라 앵글(Camera angle, 카메라가 피사체를 바라보는 각도)도 그 의도를 뒷받침합니다. 롱샷(Long shot, 인물과 배경을 함께 넓게 담는 촬영 방식)으로 파도와 인물을 동시에 잡을 때, 파도는 배경이 아니라 또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기능합니다. 반면 클로즈업(Close-up, 피사체의 일부를 크게 확대해 담는 방식)으로 연희의 눈을 잡을 때, 그 눈에 담긴 공포와 사랑이 파도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감독이 계산한 대비 효과입니다.

    저도 한때 연희처럼 누군가의 눈을 피하며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MRO 사업 실패 후, 함께 시작했던 파트너와 지인에게 사기꾼을 믿고 끌어들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내가 더 꼼꼼했다면, 더 의심했다면 하는 생각이 한동안 저를 갉아먹었습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블로그 앞에서, 심지어 헬스장 문 앞에서도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연희가 파도보다 만식을 먼저 찾은 것처럼, 저도 결국 죄책감보다 앞에 있는 사람을 먼저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2026년 5월 이백 강의를 듣고 블로그를 시작한 것이 그 결심의 결과입니다.

    독자분께 여쭤보겠습니다. 파도가 몰려올 때, 당신이 제일 먼저 눈을 찾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손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이유

    《해운대》는 2009년 개봉해 최종 누적 관객 11,324,791명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링크) 160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한국 역대 흥행 상위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CG(Computer Graphics,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완성도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남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사랑하다가 떠나보내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박중훈 씨와 엄정화 씨의 서브플롯(Sub-plot, 주요 이야기 옆에 병행하는 부차적 이야기)은 영화 전반부에서 웃음을 책임지지만, 후반부에서는 가슴을 조여 옵니다. 엄정화 씨가 딸아이를 안고 물길을 헤치는 장면은, 웃음 코드로 포장되어 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진실했는지를 단숨에 증명합니다. 코미디 연기와 재난 연기의 온도 차를 한 호흡 안에 담아내는 것, 그것이 두 배우의 공력입니다.

    한국재난안전연구원에 따르면 동해안은 일본 해구 지진에 의한 지진해일 도달 가능 지역으로 분류되며, 실제 재난 대비 시나리오가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재난안전연구원, 링크) 영화가 단순한 픽션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라면 그 파도 속에서 무엇을 붙들었을까?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습니다. 2023년 9월 28일, 성령을 받은 날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눌려있던 무언가가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2025년 12월 21일 금연을 시작했고, 2024년 10월부터 매일 회사 헬스장에서 1시간 이상 러닝과 턱걸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허리디스크로 비명을 지르던 허리가 많이 호전됐습니다. 파도는 제 통장도, 건강도, 중국에서의 15년도 한 번씩 삼켜갔지만, 제가 끝내 놓지 않은 것은 아내의 손이었고, 두 아들을 향한 눈빛이었고, 내일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독자분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당신의 손안에 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 보면 좋을지를 중심으로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 재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CG 완성도와 긴장감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시는 분이라면 후반부에서 손을 맞잡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인생에서 한 번이라도 "나 때문에"라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본 분이라면, 설경구의 눈빛 하나에 오래 머물게 될 것입니다.
    • 반면 철저한 논리와 리얼리즘을 선호하시는 분께는 다소 감성 과잉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운대》는 파도의 영화가 아니라, 파도 앞에 선 사람의 영화입니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붙드는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을, 저는 지금도 가끔 꺼내봅니다. 볼 때마다 붙들고 싶은 것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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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