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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 날 아내와 극장을 찾는 일이 요즘 저한테는 작은 사치가 됐습니다. 홍콩 누아르라는 말에 가슴이 먼저 반응했고, 금성무·고천락·양가휘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티켓을 끊었습니다. 2000년대 초 청도 주재원 시절,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DVD를 돌려보던 밤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홍콩 겨울밤, 선택의 무게가 눈처럼 쌓이다
영화는 눈 내리는 홍콩 코즈웨이베이(Causeway Bay, 홍콩 섬의 번화가)에서 사업가 한 명이 폭발과 총격으로 사망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저는 멍해졌습니다. 청도도 겨울엔 꽤 춥습니다. 주재원 첫해, 혼자 밥 먹고 혼자 걷고 혼자 잠들던 그 밤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화면 속 홍콩의 겨울 골목이 묘하게 그 시절 청도 야시장 골목과 겹쳐 보였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형제의 선택입니다. 마약 조직을 이어받아 범죄 제국을 세우려는 장남 리윈디와, 악의 고리를 끊으려는 차남 리우퉁(금성무 분)이 정면충돌합니다. 핏줄의 압박, 조직의 논리, 주변의 기대. 그걸 뿌리치고 자기 방식으로 살겠다는 동생의 선택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셨겠습니까? 저도 한때 비슷한 갈림길에 섰습니다. 중국에서 MRO 사업(산업용 소모성 자재 유통 사업)을 하다 사기를 당했을 때입니다. 10년 가까이 쌓은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주변에서는 석연찮은 방법으로 빨리 만회하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쿠팡 알바, 배민 배달, 그리고 버스 핸들. 자존심 상하는 날도 많았지만, 그것이 제 선택이었습니다. 금성무가 연기한 그 동생의 눈빛에서 그 시절의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흰 눈과 붉은 피, 네온이 만든 극한의 대비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시각적 대비(contrast, 명암과 색채의 극단적 차이)입니다. 흰 눈과 붉은 피, 차가운 파란 조명과 뜨거운 네온사인(neon sign, 가스 방전을 이용한 발광 간판). 감독은 이 대비를 통해 인물들의 내면 상태를 시각화합니다. 선과 악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본성을 색으로 말하는 방식입니다.
금성무의 눈빛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오른쪽으로 살짝 굳어지는 턱선, 말을 삼키듯 잠깐 멈추는 호흡.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배우입니다. 버스를 운전하며 수백 명의 얼굴을 매일 관찰해 온 저로서는 그런 미세한 표정 변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삶의 무게를 오래 짊어진 사람에게만 배어 나오는 표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양가휘는 힘을 빼는 것으로 오히려 압도합니다. 눈꺼풀의 무게 하나, 입꼬리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로 권력의 부패와 인간적 갈등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고천락은 비리 경찰이라는 복잡한 인물을 몸 전체로 소화했는데, 결정적 선택의 순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배우 중 누구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으로 남으셨습니까?
주노 막 감독이 설계한 침묵의 범죄 미학
주노 막(Juno Mak, 마이쥔룽) 감독은 홍콩 누아르의 문법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의 모든 시각 요소를 배치하는 연출 기법)을 구축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가장 강력한 도구는 침묵입니다. 대사가 줄어드는 순간마다 카메라는 오히려 인물의 얼굴에 더 가까이 붙습니다. 말이 없어야 표정이 살아난다는 것을 감독은 알고 있습니다.
사운드 디자인(sound design, 영화의 모든 소리 요소를 설계하는 작업)도 인상적입니다. 눈이 내리는 장면에서는 도시의 소음을 절반쯤 걷어내고, 발소리와 바람 소리만 남깁니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긴장을 극대화합니다. 버스를 운전하다 터널을 통과할 때처럼, 소음이 사라지는 순간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이 들리는 경험과 비슷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125분의 러닝타임 중 중반부가 다소 처집니다. 복수의 갈등 축이 동시에 진행되다 보니 서사의 집중도가 흐트러지는 구간이 있습니다. 그 아쉬움이 없었다면 별 하나를 더 드렸을 텁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만합니다. 홍콩 누아르의 감성을 그리워하는 분, 인간의 선택과 그 무게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분께 추천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어려웠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