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운전대를 잡고 침묵 속을 달리다 보면, 사람들은 묻곤 합니다. "그 시간이 외롭지 않으냐"라고. 저는 늘 잠깐 멈칫합니다. 외로운 게 아니라, 그 침묵이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언어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새벽 네 시, 서울 시내버스를 몰고 텅 빈 도로를 가로지를 때, 저는 종종 '이 도시에서 나는 얼마나 존재하고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 생각의 끝에서 이 영화를 만났습니다. 영화 《퍼스트 라이드(First Ride)》는 2022년 공개된 미국 단편 드라마입니다.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한 이민자 드라이버가 뜻밖의 승객을 만나며 침묵과 희생, 인간의 연대를 조용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퍼스트 라이드(First Ride, 2022)〉는 미국 LA를 배경으로 한 단편 드라마로, 이름도 배경도 거의 주어지지 않는 한 이민자 드라이버가 밤거리를 달리며 예기치 않은 승객 아이렌(Airen)을 만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이야기입니다. 화려한 CG도, 복잡한 플롯도 없습니다. 대신 이 영화는 '존재의 밀도'로 승부합니다. 줄거리보다 감정의 층위가 훨씬 두꺼운 영화, 저는 그런 영화를 오래 기억합니다.
왜 저는 이 영화를 보게 됐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추천 알고리즘이었습니다. 하지만 재생 버튼을 누른 건 포스터의 야경이었습니다. 새벽 도로 위에 홀로 선 차 한 대. 그게 꼭 제 이야기 같아서요.
"침묵" 속에 담긴 말들을 듣는 법
버스를 운전하다 보면 승객들이 제게 말을 거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은 조용히 앉아 창밖을 보거나 폰을 들여다봅니다. 저 역시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듣습니다. 누군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탑승할 때, 한숨 한 번 내쉬고 창에 이마를 기댈 때, 말 한마디 없이도 그 사람의 하루가 읽힙니다.
〈퍼스트 라이드〉의 드라이버 역시 말이 없습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그가 내뱉는 대사는 열 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감정은 한 번도 모호하지 않습니다. 영화 용어로 말하자면, 이는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 조명, 배우의 위치, 소품로 감정을 전달하는 연출 방식 덕분입니다. 감독은 대사 대신 차창에 맺힌 빗방울, 룸미러에 담긴 눈빛, 핸들을 쥔 손의 긴장감으로 그의 내면을 서술합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며 자꾸 제 새벽 운전석을 떠올렸습니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인지, 저는 소리보다 시각과 촉각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핸들의 떨림, 노면의 질감, 신호등이 바뀌는 속도. 말이 없는 세계에서도 삶은 충분히 말을 겁니다. 이 영화의 드라이버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이 왜 그토록 말을 아꼈을까요. 저는 그게 체념이 아니라 집중이라고 읽었습니다. 세상의 소음을 끄고 눈앞의 사람에게만 귀를 기울이는 방식. 말을 줄이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크게 듣는 법이라는 것, 저는 운전석에서 배웠고, 이 영화의 드라이버도 그렇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산 시간이 가르쳐 준 것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저는 중국에서 살았습니다. 처음 몇 년은 정말로 낯설었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표정을 읽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저는 늘 조금씩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 어긋남이 불편하면서도, 이상하게 저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의식하게 만드는 환경. 이방인의 시선은 때로 가장 날카로운 시선입니다.
〈퍼스트 라이드〉의 드라이버는 LA에 삽니다. 하지만 그 도시가 그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카메라는 늘 그를 도시의 주변부에 놓습니다. 넓은 대로 위에 홀로 선 차, 인파에서 한 발 비켜선 시선,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리지 않는 존재. 이것은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 구조 안에서 의도된 배치입니다. 감독은 그를 '없는 사람'처럼 그림으로써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보이게 만드는 역설을 씁니다.
이방인으로 산 사람은 압니다. 존재를 증명할 필요 없이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중국에 있을 때 저는 밥 한 그릇 시키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그 경험이 저를 작게 만든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드라이버도 그렇습니다. 도시가 그를 환영하지 않아도,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낯섦 속에서 타인의 낯섦에 가장 먼저 손을 내밉니다.
나라면 어땠을까요. 이름도 배경도 모르는 승객을 위해 그 밤 모든 것을 걸 수 있었을까요.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으로 오래 산 사람은, 도움받아야 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생깁니다. 이 드라이버의 눈이 그랬습니다.
"희생"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2024년 9월 1일, 저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전 해 2023년 9월, 처음으로 성령이 임하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희생'이라는 단어가 달리 들립니다. 예전에는 희생을 소모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희생을 사랑의 언어 중 가장 완성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주는 것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는 걸, 신앙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드라이버는 아이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던집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영화는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클로즈업(close-up), 즉 피사체를 화면 가득 당겨 찍는 기법으로 그의 얼굴을 담습니다. 두려움이 아닌 결심, 후회가 아닌 평온.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저는 화면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렌을 알지 못합니다. 가족도 아니고, 오래된 인연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저는 그게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선택. 계산이 없는 헌신. 사회복지와 심리상담을 공부하면서 저는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배웠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예외를 만들어내는지도 배웠습니다. 이 드라이버는 그 예외입니다.
희생은 상대가 고마워할 때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드라이버는 아이렌이 자신의 선택을 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그녀가 괜찮으면 됩니다. 그것이 사랑이 가장 순수해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어떤 설명도 없이 보여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밤 11시 넘어 허리를 기댄 채로 봤습니다. 다음 날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했고, 잠은 네 시간도 채 안 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바로 눕지 못했습니다. 창밖 서울의 야경을 한참 봤습니다. 저 도로 어딘가를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가 달리고 있겠구나, 그중에 이 드라이버 같은 사람이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퍼스트 라이드〉는 다음 분들께 특히 권해 드립니다.
-낯선 도시에서 혼자 버텨본 경험이 있는 분
-말이 없어도 통하는 관계가 있다고 믿는 분
-희생이란 단어 앞에서 한 번이라도 멈춰본 분
-조용한 밤에 조용한 영화가 필요한 분
쉬운 위로를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단한 하루 끝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분이라면, 이 드라이버의 침묵이 가장 따뜻한 말로 들릴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FAQ)
Q. 《퍼스트 라이드》는 어떤 장르의 영화인가요?
A. 미국 LA를 배경으로 한 단편 드라마로, 침묵과 희생, 인간의 연대를 잔잔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Q. 액션 영화인가요?
A. 아닙니다. 화려한 액션보다 인물의 감정과 관계 변화에 집중한 감성 드라마입니다.
Q.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면 추천할 만한 작품이 있나요?
A. 《더 만달로리안과 그로구》, 《일본 침묵》처럼 인간의 신념과 희생을 깊이 다루는 작품도 함께 감상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함께 보면 좋은 영화 리뷰
- 더 만달로리안과 그로구 – 혈연보다 깊은 가족의 의미
- 일본 침묵 –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 오피스 로맨스 – 가면 뒤에 숨은 인간의 고독
참고
IMDb — First Ride (2022)
The Movie Database (TMDB) — First Ride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