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진지하게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쉬는 날 오후, 버스 핸들을 내려놓고 디즈니플러스를 켠 건 순전히 심심해서였습니다. 그런데 1회가 끝나고 2회 재생 버튼을 누르는 제 손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방태섭이라는 인물 —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뒷배경(빽) 하나 없이 검사 배지를 달아낸 남자 ,이 화면 속에서 걸어 나와 저 옆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저도 중국 주재원 시절 8년을 버티면서 '배경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그 시절 기억이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채널을 돌릴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욕망 — 두려움이 포장을 바꿔 입은 이름
ENA 월화드라마 《클라이맥스》는 2026년 3월 16일 첫 방송 이후 1회 시청률 2.9%, 2회 3.8%를 기록하며 ENA 월화드라마 역대 2위라는 성적을 냈습니다(출처: 위키백과). 숫자만 보면 잔잔해 보이지만, 실제 반응은 꽤 뜨겁습니다. 정치 스릴러, 누아르, 멜로를 한 솥에 끓여놓은 이 10부작이 시청자를 붙잡는 방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가 무서운 건 욕망의 구조를 너무 정확하게 해부한다는 점입니다. 방태섭은 권력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 권력욕을 뜯어보면 결국 두려움입니다. 흙수저 출신이 언제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 — 그것이 그를 톱스타 추상아와의 전략적 결혼(strategic marriage), 즉 사랑이 아닌 이해관계로 맺어진 결합으로 이끕니다. 심리상담 공부를 하면서 배운 말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인간의 공격적 행동 대부분은 불안에서 출발한다고요. 방태섭이 아내를 의심하고 정보원 황정원을 동원해 뒷조사를 시작하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분노와 이해 사이에서 계속 흔들렸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자리에서 어땠을까요? 10년 전 살인사건의 그림자가 아내의 배경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등을 돌릴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그 정보를 무기로 삼았을까요? 저는 사기 피해를 겪으며 '사람은 왜 남을 이용하는가'를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때 내린 결론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욕망의 본질은 탐욕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두려움이 욕망이라는 옷을 입고, 그 욕망이 타인을 짓밟는 행동으로 이어진다고. 방태섭을 보며 분노하면서도 손가락질을 못 하겠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생존 — 극한에서 튀어나오는 진짜 얼굴
🎭 주지훈의 연기는 이 드라마의 핵심 자산입니다. 그는 카리스마(charisma), 즉 타인을 압도하는 자기장 같은 매력과, 동시에 균열 직전의 불안함을 한 표정 안에 담아냅니다. '서암지검의 도베르만'이라 불리는 검사가 아내의 비밀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는 미세한 변화 —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찰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지는 순간 — 을 그는 대사 없이 처리합니다. 하지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최고 톱배우 추상 아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그 경계를 하지원은 끝내 흐릿하게 유지합니다. 그게 보는 사람을 계속 불편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 이지원 감독의 연출 의도는 선명합니다. 노아르(noir), 즉 도덕적으로 모호한 세계에서 부패한 사회 구조를 드러내는 장르적 문법을 가져오되, 한국 정치 현실의 냄새를 입혀 낯설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검찰·재벌·연예계가 하나의 거대한 권력 카르텔 위에서 충돌하는 구도 — 이것이 픽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이 드라마의 날카로운 지점입니다.
심리상담 공부에서 배운 개념 중에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는 게 있습니다. 자아가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을 무의식적으로 처리하는 심리 작동 방식을 말합니다. 방태섭이 아내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하는 과정은 사실 그가 자기 자신의 공포를 외부로 투사(projection)하는, 즉 두려움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는 과정입니다. 이걸 알면서 보면 그가 더 측은해집니다. 악인이 아니라 생존의 논리에 갇혀버린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제가 서울 시내를 하루 종일 달리며 느끼는 것도 비슷합니다. 저 높은 데서 권력 다툼하는 세상이 딴 나라 이야기 같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버스 안에서도, 골목 구멍가게에서도, 아파트 관리실에서도 똑같은 욕망 구조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다를 뿐, 본질은 같습니다.
선택 — 어떻게 서는가가 그 사람을 정의한다
💡 이 드라마가 던지는 가장 묵직한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정상에 서는 것과, 어떻게 서는가, 둘 중 무엇이 한 사람을 규정하는가. 방태섭도, 추상 아도, 권종욱도, 심지어 게임 체인저로 불리는 황정원도 — 이 드라마에는 전형적 악인(typical villain), 즉 처음부터 나쁜 의도만 가진 인물이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 각자의 사연과 논리 안에서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심리상담에서 배운 말 그대로입니다. "사람은 자기 이야기 속에서는 항상 주인공이자 피해자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가졌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선택의 무게를 집요하게 묻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 선택이 쌓여서 결국 그 사람이 된다고. 2024년에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면서 저도 자주 이 질문 앞에 섭니다. 경찰공무원인 큰아들과 직장에서 버티는 작은아들에게 저는 늘 정직하게 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니, 그 말이 얼마나 큰 요구인지가 새삼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은 정직만으로 버티기 참 힘든 곳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말을 철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두려움에 지배당한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삼킨다는 것입니다. 방태섭이 아내를 무너뜨려야만 자신이 산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 비장하면서도 처연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겠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는 권력의 화려함이나 반전의 쾌감을 원하는 시청자보다, 인간이 왜 저런 선택을 하는지를 진지하게 묻고 싶은 분들에게 권합니다. 특히 치열하게 살아온 40-60대라면 방태섭의 어느 한 장면에서 반드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욕망을 악으로 단순화하지 않은 용기,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버텨낸 배우들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