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리가 욱신거려 새벽 세 시쯤 눈을 떴습니다. 잠이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오래된 노트북을 열었고, 이유도 없이 주토피아를 다시 틀었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본 건 2016년이었습니다. 중국에서 13년 가까이 버티다 귀국한 직후였는데, 서울이 낯설었습니다. 중국 청도에서는 한국 사람이라서 이방인이었고, 서울에 돌아와서는 어쩐지 중국 냄새난다는 눈빛을 받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때 극장 스크린에서 주디 홉스가 주토피아 역에 내리는 장면을 보면서,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습니다. 저도 딱 저 표정이었겠다, 싶었거든요.
주토피아는 포유류 동물들이 인간처럼 공존하며 사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합니다. 토끼 출신 신참 경찰 주디 홉스가 사기꾼 여우 닉 와일드와 손잡고 실종 사건을 수사하면서, 그 도시 이면에 깔린 편견과 혐오의 구조를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만 보면 버디 무비(두 주인공이 콤비를 이루는 형식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 풍자가 겹겹이 쌓인 레이어드 스토리텔링(단층이 아닌 복수의 의미 층위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2016년 개봉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 갈등과 정확하게 공명했고, 한국에서도 조용히 오래 회자됐습니다.
침묵이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할 때
버스를 몰다 보면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 승객 한 명 없는 노선을 달릴 때, 신호등이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뀌고 다시 초록이 될 때까지 그냥 기다립니다. 그 침묵이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많은 것이 정리됩니다.
주토피아에는 그런 침묵을 잘 쓰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닉 와일드가 어린 시절 스카우트 단원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플래시백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입마개를 씌우는 아이들의 손, 그것을 받아들이는 닉의 표정. 그 짧은 침묵이 닉이라는 캐릭터 전체를 설명합니다. 내레이션도, 배경음악의 과잉도 없습니다. 마이클 지아키노(영화음악 감독, 인사이드아웃·코코 등을 작업한 아카데미 수상자)는 이 장면에서 음악을 의도적으로 빼버립니다. 그 선택이 탁월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닥쳐오는 감각이 있습니다. 대기업을 나와 버스 핸들을 처음 잡던 날, 저를 보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도 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느껴졌습니다. '이 나이에', '그 경력으로', '왜'. 미장센(화면 속 시각 요소 전체의 배치와 구성)이 그 침묵을 얼마나 정직하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관객이 얼마나 깊이 동참하는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주토피아는 그 부분에서 상당히 정직한 영화입니다.
주디가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반복됩니다.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연출.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구조입니다. 저도 모르게 스크린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건, 화려한 CG 때문만은 아닙니다. 침묵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 영화의 연출 태도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의 무게
2004년에 처음 베이징 땅을 밟았을 때,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언어도, 사람도, 관계의 방식도. 주재원이라는 명함이 있었지만 그건 그냥 종이 한 장이었고, 현장에서는 늘 조심해야 하는 외부인이었습니다. 거의 1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고국이 더 낯설었습니다. 그게 생각보다 오래 아팠습니다.
주디 홉스가 주토피아에 처음 도착하는 시퀀스는, 이방인의 감각을 가장 잘 포착한 애니메이션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버니버로우(토끼 마을)에서 서울로 치면 지방 소도시 정도의 규모감이었던 곳을 벗어나, 처음 대도시의 밀도 속에 놓이는 그 압도감. 카메라가 주디의 시선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군중 속에서 혼자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방식은 전형적인 서브젝티브 카메라(인물의 시점을 그대로 화면에 담는 기법)입니다. 관객이 주디가 됩니다. 저는 그 순간에 2004년의 제가 됩니다.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라는 질문은 이 영화에서 계속 유효합니다. 주디는 모두가 안 된다고 했는데도 경찰이 되겠다고 버텼습니다. 그 버팀이 단순한 오기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그 선택의 비용을 숨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은 주차 담당관으로 배치받고, 동료에게 무시당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의 좁은 원룸에서 혼자 잠드는 장면들. 이방인의 삶이란 빛나는 꿈 옆에 늘 이런 밤이 붙어 다닌다는 것, 저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닉 와일드가 차별을 내면화한 과정, 그걸 벗어나는 실제 무게가 너무 빠르게 해소됩니다. 차별이란 악당 한 명을 잡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중국에서 오래 사업을 하며 피해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편견과 불신은 수십 번의 작은 무시가 쌓여 만들어지는 구조라는 걸 몸으로 압니다. 버스에서 만나는 어르신들, 사회복지 현장에서 마주한 분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 번 깊이 새겨진 상처는 유머한 줄로 봉합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이 영화의 한계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영화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희생이라는 언어, 그리고 내려놓음
2023년 9월 28일은 제 삶에서 전후로 나뉘는 날입니다. 성령충만을 경험한 날인데, 그날 이후 제가 살아온 시간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잘 됐던 시절도, 무너졌던 시절도, 지금 이 새벽에 혼자 버스를 모는 시간도 다 어떤 이유 안에 있다는 감각. 내려놓는다는 게 포기가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조금 알았습니다.
주토피아의 마지막 국면에서 주디가 닉에게 하는 말을 저는 아주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달리 생각해요." 이 대사는 캐릭터 아크(주인공이 이야기 안에서 겪는 내면 변화의 곡선)의 정점입니다. 주디가 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한 번 다 내려놨기 때문입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닉에게 직접 사과하고, 경찰 배지를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선택하는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 대사가 살아납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거창하게 쓰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먼저 내려놓는 것,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조용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디는 옳다고 믿었던 것을 일단 놓습니다. 닉은 스스로에게 씌워온 틀을 일단 놓습니다. 그 내려놓음이 있고 나서야 둘이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제가 버스 핸들을 잡기로 했을 때도 비슷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대기업 경력, 주재원 이력, 사업가라는 자의식. 그것들을 쥐고 있는 한 새 출발은 없었습니다. 내려놓는 게 쉬웠냐고 물으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내려놨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 그걸 영화 안에서 다시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조금 단단해집니다.
샤키라의 'Try Everything'이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흐를 때, 저는 이 영화가 결국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다시 정리됩니다.
"I won't give up, no I won't give in / Till I reach the end, and then I'll start again."
포기하지 않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 영화는 그 차이를 노래로 마무리합니다. 그 차이를 아는 데 저는 꽤 오래 걸렸습니다.
이 영화는 아이와 함께 보셔도 좋고, 아이 없이 혼자 보셔도 좋습니다. 다만 가장 잘 보이는 사람은, 한 번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의심해 본 적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경험이 있는 분, 스스로에게 '이 나이에'라는 말을 해본 분, 무언가를 내려놓는 게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는 분. 그런 분들께 권합니다.
다소 아쉬운 결말의 속도와 닉 캐릭터의 밀도 부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분명합니다.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꾸지는 않지만, 새벽 세 시에 혼자 보는 사람의 하루 정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걸 경험했습니다.
아카데미 공식 홈페이지 — 제88회 장편 애니메이션 수상 기록](https://www.oscars.org/oscars/ceremonies/88))
[로튼 토마토 — Zootopia 비평가·관객 지수](https://www.rottentomatoes.com/m/zootop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