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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운행을 마치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는데, 채널을 돌리다 유덕화 얼굴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리모컨을 멈추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중국 주재원으로 8년을 살면서 홍콩 영화를 워낙 달고 살았으니, 유덕화 얼굴은 저에게 일종의 조건반사 같은 것입니다.
당나라 장안은, 내가 살던 그 땅이었다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은 서기 690년 당나라를 배경으로 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를 꿈꾸는 측천무후(유가령 분) 앞에 심복들이 아무런 흔적 없이 불에 타 죽는 연쇄 변사 사건이 벌어지고, 황실은 "하늘의 분노"라는 민심의 공포 속에 뒤흔들립니다. 측천무후는 누명을 쓰고 변방으로 쫓겨났던 천재 수사관 적인걸(유덕화 분)을 급히 불러들여 사건을 맡깁니다. 적인걸은 잿더미만으로 수사를 시작해 황린(인체에 축적되면 자연발화를 일으키는 성분)이 범행 도구임을 밝혀내고, 오랫동안 측천무후 암살을 준비해 온 사퉈(양가휘 분)의 음모를 파헤칩니다. 줄거리는 여기까지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속 풍경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는 2004년 처음 중국 땅을 밟았을 때 그 압도적인 스케일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넓어도 너무 넓고, 사람도 너무 많고, 역사도 너무 두꺼웠습니다. 영화 속 거대한 관음상 건축 현장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아, 저게 진짜 중국이지"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극 중에 녹아 있는 관시(關係, 중국 특유의 인맥·신뢰 기반 관계망) 문화,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다른 계산을 하는 그 복잡한 역학이 저한테는 영화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겪어본 삶이었습니다. MRO 사업을 하면서 현지 거래처 분들과 식사도 하고 치열하게 협상도 해봤으니까요. 적인걸이 권력자들 틈에서 눈치 보지 않고 오직 증거 하나로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그래서 더 통쾌하게 느껴졌습니다.
적인걸이 좌천된 상황에서도 실력을 잃지 않고 잿더미 하나에 집중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저도 사기 피해를 당하고 나서 한동안 바닥을 기었습니다. 열심히 쌓은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면 사람이 쉽게 꺾입니다. 그런데 적인걸은 억울함을 드러내는 대신 눈앞의 단서에 집중했습니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쿠팡 새벽 배송 뛰고, 배민 배달하고, 지금은 버스 핸들 잡으면서 매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재기의 과정이 적인걸의 저 조용한 집중력과 어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빛 하나가 대사보다 무겁다 - 배우들이 몸으로 쓴 이야기
유덕화의 적인걸은 말이 없는 인물입니다. 현장에 도착할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천천히 훑는데, 그 눈빛에는 날카로운 분석력과 함께 세상을 오래 살아온 사람 특유의 피로가 겹쳐 있습니다. 억울하게 좌천당했음에도 흥분하거나 자기 억울함을 내세우지 않고, 담담하게 사건에 몰입하는 그 태도는 유덕화의 절제미(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강렬하게 전달하는 연기 기술)가 아니었다면 표현하기 어려운 지점이었습니다. 분노를 안으로 삭히는 그 정제된 연기가 오히려 보는 이의 가슴을 더 답답하게 조여왔습니다.
유가령의 측천무후는 이 영화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지만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위협받는 여인. 그녀는 황좌에 앉아서도 말하는 도중 눈꺼풀이 잠깐 내려앉거나, 손끝을 아주 미세하게 떠는 방식으로 불안을 표현했습니다. 화려한 의상과 단호한 목소리 뒤에 숨겨진 두려움을 표정의 아주 작은 균열로만 전달하는 방식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중국 주재원 시절 현지 고위직 인사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들에게서도 비슷한 냄새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권력자일수록 더 많은 것을 감추려 하고, 그 감춤 자체가 얼굴에 배어 나온다는 것을요. 유가령은 그걸 정확하게 잡아냈습니다.
이빙빙의 상관정아는 또 다른 결의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충성과 의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인데, 몸의 방향을 적인걸 쪽으로 살짝 틀거나 시선을 잠깐 멈추는 것만으로 내면의 갈등을 드러냈습니다.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도 그녀의 눈이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양가휘가 연기한 사퉈는 등장 내내 믿음직스럽게 보였는데, 반전이 드러나는 순간 그 믿음직함이 모두 계산된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그 배신감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저를 사기 쳤던 사람도 아마 그랬겠지요. 겉으로는 믿을 만한 파트너처럼 굴면서 오랫동안 함정을 팠을 테니까요.
서극이 카메라로 말하는 것 - 연출 의도와 영화의 진짜 메시지
서극(徐克) 감독은 이 작품에서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연출 방식)을 매우 의도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측천무후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low angle, 피사체를 압도적으로 크게 보이게 만드는 하향 시점) 기법을 씁니다. 그녀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동시에, 그 높이 자체가 얼마나 위태로운 자리인지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반면 적인걸이 수사하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그의 시선과 같은 높이에서 천천히 따라갑니다. 관객이 그와 함께 사건을 풀어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조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황실 내부 장면은 붉은빛과 금빛이 강하게 섞인 고조도 조명(high-key lighting, 밝고 화려한 인공조명으로 화면을 채우는 기법)을 사용해 화려함 뒤에 숨겨진 욕망을 표현한 반면, 수사 장면은 어둠과 그림자가 절반을 차지하는 저조도 화면으로 처리했습니다. 진실은 어두운 곳에 있다는 감독의 시각이 조명 하나로 전달됐습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이 단순한 추리극이 아니라 진실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버티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적인걸은 권력에 의해 짓밟혔고, 누명을 썼고, 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증거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권력이 진실을 덮으려 할 때도, 위협이 목 앞까지 다가왔을 때도, 그는 잿더미에서 황린을 찾아냈습니다. 저는 2025년 12월 21일에 금연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데, 매일 아침 담배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장면이 떠오릅니다. 작은 것 하나에 집중하는 것, 그게 결국 버티는 방법이라는 걸 이 영화가 다시 가르쳐줬습니다.
추천 대상: 중국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분, 화려한 볼거리와 묵직한 이야기를 함께 원하는 분, 홍콩 영화 황금기를 그리워하는 중장년층 관객께 적극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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