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간 근무를 마치고 새벽 두 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습니다. 씻고 나서도 잠이 오질 않아 리모컨을 집어 들었고, 넷플릭스 화면에서 스콧 앳킨스의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존 윅 4》에서 처음 제대로 본 배우인데, 그때부터 '이 사람은 진짜 몸으로 싸우는 배우구나' 싶었거든요. 그렇게 별 기대 없이 틀었던 영화 《디아블로》가 저를 새벽 내내 붙잡아 두었습니다.
감독의 연출 의도 -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의 진심을
에르네스토 디아즈 에스피노사(Ernesto Díaz Espinoza) 감독은 칠레 출신으로, 라틴 아메리카 액션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배우 마르코 자로와 오랜 친구 사이로, 두 사람은 《미라지맨(Mirageman)》, 《피스트 오브 더 콘도르(The Fist of the Condor)》 등을 함께 만들며 할리우드 대자본 없이도 강렬한 결과물을 만들어온 팀으로 유명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뭔가 묘하게 마음이 당겼습니다.
저도 2019년 사기 피해를 당한 뒤 쿠팡 새벽 배송 알바로 시작해서, 배민을 뛰고, 지금은 버스 핸들을 잡고 있습니다. 화려한 자본 없이 맨손으로 다시 시작하는 삶. 이 감독의 철학이 단순한 영화 기법이 아니라 삶의 자세와 닿아 있다고 느꼈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액션의 쾌감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여성이 낯선 전과자에게 "내 딸을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축인데, 저는 그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세상에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사람이라도, 간절한 부탁 앞에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 감독은 그 메시지를 거칠고 날카로운 액션의 언어로 전달하려 했다고 봅니다. 독자 여러분은 누군가의 마지막 신뢰를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 무게가 어느 순간 당신을 움직인 적이 있었나요?
각본을 쓴 맷 샌섬(Mat Sansom)도 인물의 동기(動機, 행동의 이유)를 설득력 있게 구성했습니다. 주인공이 왜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는지, 그 심리적 필연성이 자연스럽게 깔려 있어서 억지스러움이 없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의 심리 - 도망이 아니라 리셋이었다
전과자 크리스 채니가 콜롬비아로 향하는 것은 도피(逃避, 현실에서 달아남)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일종의 지리적 리셋(reset, 새로운 시작)이라고 봤습니다. '여기서는 나를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 심정을 저는 잘 압니다.
저도 2004년 중국 주재원으로 처음 나갔을 때 비슷한 기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쌓인 것들을 내려놓고,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증명해 보겠다는 각오. 언어도 낯설고 문화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낯섦이 오히려 저를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크리스가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 던져졌을 때 느꼈을 고독과 결기(決氣, 굳게 다잡은 마음의 기운), 저는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 스콧 앳킨스의 몸 자체에서 배어 나온다고 느꼈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출소 후 아무도 없는 낯선 나라에서 죽어가는 여자를 만났다면, 저는 그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는 받아들입니다. 그게 이 영화를 단순한 액션 영화와 구분 짓는 지점입니다.
사기 피해 이후 저도 한동안 아침에 눈 뜨는 게 두려웠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믿은 제 자신도 원망하고. 십 년 가까이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은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크리스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무너진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닐 때 오히려 더 강해진다는 것.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 그게 때로는 스스로도 몰랐던 힘을 끌어냅니다.
악역 엘 코르보의 논리 - 나를 사기 친 그 사람도 처음엔 말이 됐다
마르코 자로(Marko Zaror)가 연기하는 악역 엘 코르보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악당이 아닙니다. 사이코패스(psychopath,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지닌 인물)이면서도 묘하게 논리가 있고, 자기만의 세계관이 뚜렷합니다. 그 점이 소름 돋았습니다.
저를 사기 친 사람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말이 됐습니다. 논리가 있었고, 비전이 있었고, 시간이 쌓이면서 신뢰(信賴, 믿고 의지함)가 생겼습니다. 나쁜 사람이 다 처음부터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게 사기의 본질이고 악의 본질입니다. 엘 코르보를 보면서 제가 10년 전에 당한 일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씁쓸하면서도, 그 씁쓸함이 영화를 더 실감 나게 만들었습니다.
마르코 자로는 《언디스퓨티드 3: 리뎀션》에서 스콧 앳킨스와 처음 호흡을 맞춘 이후 여러 작품에서 함께해 온 배우입니다. 두 사람이 스크린에서 맞붙을 때의 긴장감은 단순한 격투씬(格鬪, 몸으로 맞서 싸우는 장면)을 넘어서, 두 철학이 충돌하는 느낌을 줍니다. 저는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봅니다.
독자 여러분, 살면서 말이 너무 잘 맞던 사람이 결국 당신을 실망시킨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 경험이 이 영화를 보는 눈을 달라지게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실망 이후에도 다시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있다면, 크리스의 선택이 더 깊이 들어올 겁니다.
《디아블로》는 단순한 B급 액션 영화처럼 시작하지만, 보고 나면 꽤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저는 새벽에 홀로 그 영화를 보면서, 제가 쿠팡 새벽 배송 박스를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던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그 시절의 저도 나름의 미션(mission, 사명이자 임무)이 있었습니다. 가족을 지키는 것, 다시 일어서는 것. 크리스와 저는 전혀 다른 처지였지만, 그 마음만은 겹쳐 보였습니다.
참고로 스콧 앳킨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IMDb 스콧 앳킨스 프로필을, 에르네스토 디아즈 에스피노사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궁금하신 분은 Rotten Tomatoes 감독 페이지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 추천드립니다. 특히 한 번쯤 무너진 적 있는 분, 낯선 곳에서 혼자 뭔가를 해낸 적 있는 분, 나쁜 사람에게 배신당하고도 다시 일어선 분들께. 액션이 주는 카타르시스(catharsis, 감정의 정화와 해소) 이상의 것이 있는 영화입니다. 새벽에 혼자 보기 딱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