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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 저는 버스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였습니다. 쿠팡과 배민 배달 알바를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시절이었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내와 함께 동네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코미디 영화니까 그냥 웃고 오자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제 눈이 조금 촉촉해져 있었습니다. 아내가 "왜 그래요?" 하고 물었고, 저는 "아, 가스 때문에 눈이…"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철봉맨의 눈빛이 체념에서 생존으로 바뀌는 순간
조정석이 연기한 이용남을 처음 볼 때, 솔직히 측은함이 먼저 왔습니다. 누나들에게 구박받고 어린 조카에게도 무시당하는 그 눈빛 분노도 반항도 아닌, 익숙해진 체념의 눈빛이었습니다. 조정석은 그 묘한 지점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냈습니다. 완전히 무너진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망에 찬 사람도 아닌, 그 어딘가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람.
저는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중국에서 MRO 사업을 하다 무너지던 시절이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청도와 웨이하이에서 8년간 공장 관리 책임자로 나름 인정받으며 살았는데, 사업이 꼬이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사기까지 당하고 나니 저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15년을 살아낸 중국 땅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 첫해, 저는 용남처럼 존재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가스가 퍼지기 시작하는 순간, 조정석의 몸이 달라집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연기의 핵심은 대사가 아니라 몸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철봉을 잡는 손의 각도, 건물 외벽을 오를 때 무게중심을 낮추는 허리, 의주를 끌어올릴 때 이를 악무는 턱의 긴장감. 그동안 백수로 '낭비'되던 근육이 갑자기 생명을 구하는 도구가 되는 장면에서, 조정석은 표정 하나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반전을 설득력 있게 전달합니다. 화려한 영웅의 표정이 아니라 '이거 해본 사람'의 담담함 그것이 오히려 더 강렬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자신에게 쓸모없다고 느끼는 무언가가 있지 않으십니까? 저는 2024년 10월, 회사 헬스장에서 처음으로 턱걸이 봉을 잡던 날이 그 장면과 겹쳐 보였습니다. 허리디스크로 몸도 성치 않은데, 한쪽 귀는 잘 안 들리는데, 발바닥은 저리는데, 그래도 봉을 잡았습니다. 첫날은 두 개도 못 했지만, 다음 날 또 갔고, 그다음 날도 갔습니다. 지금은 매일 1시간 이상 러닝과 턱걸이와 허리 강화 운동을 합니다. 허리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용남이 조각상을 발판으로 삼은 것처럼, 저는 아픔을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영화 비평 용어로 이런 연기 방식을 피지컬 액팅(Physical Acting, 몸의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연기 기법)이라고 합니다. 조정석은 이 영화에서 코미디 연기와 액션 연기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이 웃다가 어느 순간 숨을 참게 만드는 고난도의 리듬을 완성해 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엑시트가 되는 두 사람의 연대
임윤아의 연기도 이 영화에서 예상보다 훨씬 단단했습니다. 아이돌 출신이라는 선입견을 스스로 깨트리듯, 그녀는 의주를 결코 구출 대상으로만 그리지 않았습니다. 벽을 오르는 장면에서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는 방식, 무섭지만 무섭다고 말하지 않는 표정 공포와 결의를 동시에 품은 눈빛이 용남과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구하는 구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엑시트'가 되는 구도로 연기했습니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끝까지 현실적인 톤을 유지한 점이 의주라는 인물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었습니다. 의주가 용남에게 소리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빠, 거기 있어요! 내가 올라갈게요!" 저는 그 장면에서 생각이 잠깐 멈췄습니다. 혼자 탈출하는 영화가 아니라, 서로를 잡아주는 영화였습니다. 저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1999년에 위암 진단을 받았던 아내가 완치된 뒤 지금도 제 곁에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준비하며 함께 재기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두 아들을 로컬 학교에 보내며 온 가족이 함께 버텼던 그 시간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예전에는 이 영화를 그냥 시원한 오락 영화로만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연대(連帶, solidarity)의 영화로 읽힙니다. 용남 혼자였다면 탈출이 불가능했고, 의주 혼자였다면 더더욱 불가능했습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서로의 강점을 살려주는 관계 — 그것이 이 영화가 단순한 재난 코미디를 넘어서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당신 곁에는 함께 옥상을 향해 오르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을 오늘 한 번쯤 떠올려보셨으면 합니다.
또한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의 로맨스를 과도하게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용남이 의주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에피소드는 영화 내내 유머 장치로만 활용되고, 감독은 그것을 신파(新派, 감상적인 눈물 유도 방식)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이상근 감독이 류승완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하며 익혔다는 '군더더기 없는 구성'이 이 지점에서 가장 빛납니다.
한국 상업 건물의 조잡함이 탈출의 발판이 된 역설
이상근 감독이 이 영화에서 선택한 배경은 참으로 탁월합니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처럼 거대한 댐이나 마천루가 아닙니다. 웨딩홀, 고깃집 환기구, 헬스장 옥상, 뜬금없이 붙어 있는 조각상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한국 상업 건물의 특유한 '조잡함'이 오히려 탈출의 발판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배경 선택이 아닙니다. 감독은 한국 사회의 밀도와 무질서함이 오히려 생존의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 시선을 카메라에 담은 것입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좁고, 간판이 빼곡하고, 외벽에 뭔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 환경. 서울 시내버스를 6년 넘게 몰면서 저도 매일 그 풍경을 봅니다. 좁은 골목에 불법 주차된 차, 인도를 반쯤 점령한 간판, 건물 외벽을 가득 채운 광고물들.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것들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됐습니다.
카메라 앵글도 이 역설을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두 사람이 건물을 오를 때 감독은 롱샷(Long Shot, 인물을 멀리서 담아 공간 전체를 보여주는 기법)과 클로즈업(Close-up, 인물의 표정이나 손 등을 극도로 가까이 담는 기법)을 빠르게 교차합니다. 롱샷으로는 건물의 높이와 도시의 공포를 보여주고, 클로즈업으로는 손끝의 떨림과 결의를 보여줍니다. 이 교차편집(Cross-cutting, 두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며 긴장감을 높이는 편집 기법)이 코미디와 스릴러 사이의 경계를 절묘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엑시트〉는 누적 관객 약 941만 명을 기록하며 2019년 한국 박스오피스 3위에 오른 작품입니다.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 천만 관객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한 수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이 영화의 성격과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영웅이 아닌 용남처럼, 완벽한 흥행작이 아니지만 오래 기억되는 영화.
이상근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도 다시 보게 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자료에 따르면 신인 감독의 첫 장편이 500만 관객을 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에 해당합니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 첫 도전에서 941만이라는 숫자는, 60대에 블로그를 처음 시작한 저에게도 작은 용기를 줍니다. 이백 강의를 듣고 2026년 5월 26일부터 블로그를 시작한 저는, 지금도 매일 글 하나를 올리며 나만의 엑시트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발 딛고 있는 조잡하고 불편한 그 환경이, 어쩌면 당신만의 탈출 발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영화는 다음 분들께 특히 추천드립니다.
-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주춤한 사람, 그 '쓸모없던 시간'이 언젠가 빛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
- 혼자 버티는 것에 지친 분, 함께 올라가는 연대의 이야기가 필요한 분
- 무겁지 않게 웃고 싶지만, 그 웃음 속에서 뭔가 한 가지 건져가고 싶은 분
가족과 함께 보기에도, 오랫동안 연락 못한 친구와 함께 보기에도 좋은 영화입니다. 저처럼 피곤한 날 아내와 손잡고 극장에 들어가서, 웃다가 나오는 길에 눈이 조금 촉촉해져도 괜찮은 영화입니다. 웃음으로 시작하지만, 끝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참고 문헌
- 영화진흥위원회(KOBIS), 「엑시트」 관객 수 및 흥행 정보
- IMDb, EXIT (2019)
- 다음 영화, 「엑시트」
- 씨네 21, 이상근 감독 인터뷰
- 한국영상자료원(KOFA), 한국영화 제작 및 감독 자료
- 나무위키 — 엑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