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너무 어렵다"는 인상만 남았습니다. 대사도 없고, 설명도 없고, 화면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새벽 네 시 반에 첫차를 몰고 나가면서 갑자기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텅 빈 도로, 아무도 없는 루브르의 복도, 그리고 그 안에서 혼자 서 있는 이강생의 뒷모습. 그제야 알았습니다. 이 영화는 설명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나는 멈췄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말은, 어떤 언어로도 충분히 담기지 않습니다. 차이밍량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저는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갔습니다. 영화 속 이강생이 루브르 박물관의 거대한 지하 복도를 걸어가는 그 장면. 카메라는 그를 멀리서 바라볼 뿐, 절대로 쫓아가지 않습니다. 그 거리감이 처음에는 연출의 차가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압니다. 그건 슬픔 앞에서 카메라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태도였다는 것을.
이 장면에서 차이밍량이 사용하는 연출 방식을 영화 용어로 롱테이크(long take)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컷 없이 하나의 장면을 아주 길게 찍어내는 기법입니다. 편집으로 감정을 '만들어내는' 대신, 시간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면서 관객 스스로가 그 공간 안에 함께 서 있도록 만드는 방식입니다. 차이밍량의 롱테이크는 그냥 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애도의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흐르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저도 그 느림을 알고 있습니다. 2004년 봄, 회사 발령으로 처음 상하이 공항에 내렸을 때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택시 기사와 말이 통하지 않았고, 호텔 방 창밖의 낯선 네온사인들이 저를 완전히 다른 행성에 데려다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때 느꼈던 것, 그 이방인의 감각이 이 영화에서 이강생이 루브르 복도를 걷는 장면과 겹칩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 과장, 집에서는 아버지였는데 거기서는 그냥 얼굴 없는 사람 하나였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얼굴(Visage)'인 이유가, 저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앞에서, 혹은 완전한 낯섦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잃어버립니다. 이강생이 어머니를 잃고 루브르에서 살로메 영화를 찍는 동안, 그가 잃어버린 건 어머니만이 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정의되던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을 겁니다.
주인공이 왜 그 거대한 루브르에서 혼자 서성이는 선택을 했을까요. 저는 그 질문을 한참 생각했습니다. 슬픔은 좁은 공간에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박물관의 높은 천장, 끝없는 복도, 몇천 년의 시간이 쌓인 그림들 사이에 혼자 서 있을 때만 비로소 슬픔의 실제 크기를 마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요.
"우리"가 함께 외면해 온 슬픔의 무게
"우리"는 슬픔을 잘 처리하지 못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처리하려 들지 않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사흘을 버티고 나면 어느 순간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예의처럼 되어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 옆에서 "이제 좀 괜찮아?"라고 묻는 것도 사실은 그 슬픔이 빨리 정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슬픔을 끝내야 할 일처럼 대합니다.
차이밍량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의 죽음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장 피에르 레오가 연기하는 노배우, 나탈리 바이, 페 도르세 같은 프랑스 누벨바그의 아이콘들이 등장해서 화면을 채우는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거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고독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을 영화 용어로 미장센(mise-en-scène)이라고 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배우의 위치·소품·배경을 감독이 의도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차이밍량의 미장센은 말 대신 공간으로 감정을 설계합니다. 배우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 서로를 향하지 않는 시선, 그것이 곧 "우리는 함께 있지만 각자의 슬픔 안에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영화가 2009년 칸 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불편한 침묵이 그냥 실험적 기벽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루브르 박물관이 최초로 커미션을 의뢰한 영화라는 이력도 같은 맥락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의 집이 선택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예술이 해야 할 일이 '위로'가 아니라 '직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출처: 칸 국제영화제).
저는 귀국 후 빈손이 된 그 시절을 떠올립니다. 중국에서 믿었던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2019년에 서울로 돌아왔을 때, 주변 사람들은 빨리 털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야", "이제 새 출발이잖아". 그 말들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 슬픔을 아직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는데 이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나라면 그 슬픔을 어떻게 했을까. 아니, 실제로 저는 어떻게 했을까. 버스 핸들을 잡았습니다. 새벽 네 시 반, 텅 빈 서울 도로를 달리면서 말 못 할 감정들을 그냥 앞으로 가는 것으로만 버텼습니다. 그것이 제가 슬픔을 외면하는 방식이었는지, 아니면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비로소 "애도"가 삶을 다시 열어준다
"애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것이라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진지하게 했습니다.** 차이밍량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어머니의 죽음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이강생이 연기하는 인물은 그 슬픔 안에 계속 머뭅니다. 물과 얼음의 이미지가 영화 전체에 반복되는데, 쉽게 말해 물은 흘러가는 시간이고 얼음은 그 시간이 멈춰버린 상태입니다. 차이밍량의 화면은 그 두 가지를 번갈아 보여주면서, 애도란 무엇인지를 물과 얼음 사이 어딘가에 놓아둡니다.
영화의 연출 방식 중에 딥포커스(deep focus)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화면의 가까운 곳과 먼 곳이 동시에 선명하게 찍히는 방식으로, 전경의 인물과 배경 깊숙한 곳의 공간이 모두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딥포커스를 통해 이강생이 서 있는 현재와 그 뒤에 펼쳐진 루브르의 역사적 공간이 동시에 선명하게 공존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 이 슬픔과 수천 년의 시간이 쌓인 공간이 같은 밀도로 존재한다는 것, 즉 내 애도는 인류가 반복해 온 애도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다만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솔직한 이견을 갖고 있습니다. 차이밍량은 애도를 끝없이 머무는 것으로 그립니다. 예술적으로는 정직하고 탁월합니다. 그런데 2023년 가을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2024년 세례를 받으면서, 저는 애도에 대한 다른 언어를 갖게 됐습니다. 부활이라는 언어입니다. 슬픔 안에 머무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차이밍량의 영화가 애도의 깊이를 정직하게 보여준다면, 저는 그 깊이에서 끝내 솟아오르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제가 영화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IMDb에서 이 영화의 평점을 확인하면 7점대 초반으로 높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나쁜 영화'라서가 아니라, '쉬운 영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오히려 이 영화가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출처: IMDb).
이 영화는 모든 사람에게 권하기 어렵습니다. 긴 호흡, 침묵, 설명 없는 화면에 익숙하지 않다면 힘들 수 있습니다. 다만 상실을 겪어본 분,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분, 혹은 그냥 한 번쯤 슬픔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은 분께는, 이 영화가 다른 어떤 말보다 정직하게 곁에 있어줄 겁니다. 차이밍량의 침묵은 때로 가장 큰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