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안시성

    2018년 개봉한 김광식 감독의 《안시성》은 당태종의 20만 대군에 맞서 고작 5천 명으로 88일을 버텨낸 고구려 안시성 전투를 조인성·남주혁 주연으로 그려낸 215억 원 규모의 역사 액션 블록버스터입니다. 수치만으로도 압도적인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버림받은 성주 양만춘이 본국을 위해 싸우는 아이러니한 인간 드라마를 묵직하게 담아냈습니다.
    퇴근 후 소파에 기대 무심코 켰다가 135분을 꼼짝없이 앉아서 봤습니다. 저는 원래 역사 사극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인데, 화면 속 흙벽이 무너지고 다시 쌓이는 장면에서 어느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5천의 성벽이 20만을 막아낸 이유

    88일. 저는 이 숫자를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습니다. 단순한 전투 기록이 아니라,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숫자 하나로 압축해 놓은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계에 따르면 《안시성》은 국내에서 누적 관객 544만 명을 돌파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링크) 215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라는 사실보다, 5천 명이 20만 대군을 88일 동안 막아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예고편이었던 셈입니다.

    버스를 운전하다 보면 신호 대기 중에 창밖 사람들 얼굴을 읽게 됩니다. 퇴근길 지친 직장인, 무거운 장바구니를 든 어머니, 이어폰을 꽂고 멍하니 창밖을 보는 학생. 저는 그 얼굴들을 보며 삶이라는 전장을 조금씩 읽어 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 사람들은 지금 어떤 성벽 앞에 서 있을까.

    영화 속 안시성 전투에서 당나라 군은 토산(土山), 즉 거대한 인공 흙산을 수십만 명이 달라붙어 몇 달에 걸쳐 쌓아 올립니다. 성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 위한 물량 전술입니다. 압도적인 자원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방식이지요. 저는 그 장면에서 시골 어린 시절 농사일이 떠올랐습니다. 벼와 옥수수, 감자밭에서 아버지 옆에 쪼그려 앉아 땅을 일구던 기억. 흙이라는 건 퍼내도 퍼내도 결국 대지가 이긴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안시성도 그랬습니다. 토산이 무너지는 순간 전세가 뒤집혔고, 흙으로 쌓은 전술은 결국 흙으로 무너졌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토산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물량으로 압도해 오는 그 무언가 앞에서, 성벽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저 역시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2013년 중국 청도에서 MRO 사업을 운영하다 동업자 배신으로 사업이 통째로 흔들리던 때였습니다. 15년 가까이 가족과 함께 뿌리내린 중국 땅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기울어지는 느낌. 그날 밤 청도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다 쪽 불빛을 바라보며 '여기서 접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위암 수술 후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두 아들은 현지 로컬 학교에서 나름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베란다에서 돌아서서 식탁에 앉아 장부를 다시 펼쳤습니다. 도망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양만춘이 성벽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처럼요.

    양만춘의 눈빛이 담아낸 모순의 무게

    조인성이 연기한 양만춘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게를 지고 사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개소문에게 반역자로 낙인찍힌 성주. 본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그 본국을 위해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한 처지입니다. 조인성은 그 모순을 대사로 설명하지 않고 눈빛 하나로 담아냈습니다. 분노와 억울함과 비장함이 동시에 담긴 그 눈빛은 말이 많은 눈이었습니다.

    성벽 위에서 당나라 대군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그의 표정은 두려움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두려움을 통과한 사람의 고요함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훨씬 더 무섭고 아름다웠습니다. 연기 용어로 흔히 말하는 서브텍스트(subtext, 대사 뒤에 숨은 감정의 층위)를 조인성은 극도로 절제된 표정으로 구현해 냈습니다.

    김광식 감독은 이 영화를 역사 고증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의 감정에 관한 이야기'로 설계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실제로 카메라의 시선은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도를 자주 활용합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위압감을 주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오히려 고독감이 전달됩니다. 양만춘은 가장 높은 곳에 있지만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고, 감독은 그것을 카메라 앵글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조명과 색감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의도적인 선택을 합니다. 성 안은 흙빛과 불빛이 섞인 따뜻한 황갈색 톤인 반면, 당나라 진영의 장면은 서늘한 금속성의 색조를 유지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배치하는 연출 방식)이 감정을 대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사극 영화를 볼 때 '얼마나 역사적으로 정확한가'를 먼저 따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봅니다. 고증의 완벽함보다 감정의 진실함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60대에 접어들고 나서야 영화 보는 눈이 조금 넓어진 것 같습니다.

    적의 첩자가 안시성 사람에게 감화된 순간

    남주혁이 연기한 사물은 이 영화의 감정적 통로입니다. 적의 첩자로 안시성에 침투했다가 양만춘이라는 인물에게, 그리고 성 안 사람들에게 서서히 감화되어 가는 과정이 이 영화의 감정적 핵심입니다. 남주혁은 그 변화를 대사가 아니라 몸의 방향으로 표현했습니다. 처음엔 계산적으로 성 안을 관찰하던 눈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리고 몸이 서서히 사람들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몸짓의 방향이 곧 마음의 방향이었습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역사 영화 관람 동기의 1순위는 '실제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공감'으로 나타납니다.(출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링크) 사물이라는 캐릭터가 그 공감의 설계도였던 셈입니다. 관객은 양만춘보다 사물의 시선을 통해 안시성을 처음 봅니다. 낯선 자의 눈으로 들어갔다가, 그 낯선 자가 변해가는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관객 스스로도 안시성 사람이 되어가는 구조입니다.

    당신은 살면서 처음엔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가장 깊이 이해하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1984년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해 생산관리 현장에서 일할 때, 처음에 가장 까다롭게 굴던 현장 반장이 있었습니다. 뭘 바꾸려 해도 "해봤는데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던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수십 년을 그 자리에서 기계 소리를 들으며 공장을 지켜온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그분이 완고한 게 아니라 그 현장을 가장 오래,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사물이 양만춘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그 기억과 겹쳤습니다.

    엄태구의 파소는 또 달랐습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계산하지 않고 느끼는 캐릭터. 덕분에 전장의 열기가 스크린 밖으로 전달됐습니다. 세 인물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안시성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표현했고, 그 앙상블이 영화를 두껍게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전반부의 정치적 배경 설명이 다소 빠르게 처리되어 고구려 내부 갈등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전투로 넘어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김설현이 연기한 백하 캐릭터도 여군 부대 수장이라는 설정에 비해 활용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CG(컴퓨터 그래픽)가 몇 장면에서는 완성도가 다소 고르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를 강하게 추천합니다. 특히 지금 어떤 싸움을 치르고 있는 분들, 숫자와 물량으로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고 계신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5천이 20만을 막아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이유가 충분합니다. 버티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임을 88일이 증명했습니다.

    별점: ★★★★☆ (4/5)

    ❓ 자주 묻는 질문

    Q. 안시성 전투는 실제 역사인가요, 아니면 창작인가요?
    A. 안시성 전투는 실제 역사입니다.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안시성에서 수십 일간 저지당하고 퇴각한 사건으로, 중국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성주 양만춘의 이름은 정확한 역사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이후 기록에서 전해진 이름입니다.

    Q. 안시성 러닝타임과 관람 연령은 어떻게 되나요?
    A. 상영 시간은 135분이며, 15세 이상 관람가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투 장면의 강도가 있어 어린 자녀와 함께 관람할 때는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Q. 조인성과 남주혁 중 누구의 연기가 더 돋보이나요?
    A. 두 배우의 역할이 다릅니다. 조인성은 절제와 무게감으로, 남주혁은 감정의 변화 곡선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돋보입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르기보다 두 캐릭터의 대비 자체를 즐기는 것이 이 영화를 더 깊이 보는 방법입니다.

    Q. 안시성, 국내 흥행 성적은 어떻게 됐나요?
    A. 영화진흥위원회 통계 기준 국내 누적 관객 수 약 544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상위권 성적이었으나, 제작비 대비 손익분기점(BEP)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 함께 보면 좋은 영화

    • 군함도 — 일제강점기라는 다른 시대 배경이지만, 압도적인 권력에 맞서는 민중의 저항과 생존이라는 주제가 《안시성》과 공명합니다.
    • 인천상륙 작전 
    • 추격자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