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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플러스 사이즈를 입는다] 새벽 운전대 위에서 미란다 를 만났다

by 어성초님 2026. 5. 31.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2006년 개봉 당시, 주변에서는 "패션 업계 이야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저는 별 관심 없이 지나쳤습니다. 그때 저는 상하이 푸동 한복판에서 실적과 숫자에 쫓기던 주재원이었으니까요. 그런 영화를 볼 여유도, 공감할 거리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새벽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차고지에서 시동을 걸다가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렸을 때, 제가 그동안 얼마나 틀린 방향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게 됐습니다.

《악마는 플러스 사이즈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는 패션 영화가 아닙니다. 야망과 자아 사이에서 길을 잃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는 화려한 런웨이 뒤편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모든 이들의 초상입니다.

로렌 와이스버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앤디 삭스(앤 해서웨이)가 세계적 패션 매거진 Runway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스틀리(메릴 스트립)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그 세계에 전혀 어울리지 않던 앤디가 점차 그 문화에 동화되면서 자신이 원하던 것과 멀어지고, 결국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줄거리만 보면 단순합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뼈대 위에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은 아주 날카로운 질문들을 얹어놓습니다. 주인공은 왜 그 세계를 떠났을까요?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용기였을까요, 아니면 도피였을까요?

"새벽 운전대 위"에서 마주한 나 자신

새벽 4시, 차고지 형광등 불빛 아래서 시동을 거는 시간이 있습니다. 허리는 이미 아프고, 잠은 네 시간도 못 잔 날이 대부분입니다. 그 고요한 순간에 저는 가끔 제가 누구였는지를 떠올립니다. 1984년 대기업에 입사해서, 이십 년 가까이 조직 안에서 살았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 버스 핸들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날은 아무렇지도 않고, 어떤 날은 새벽 차고지만큼이나 서늘하게 느껴집니다.

앤디가 처음 런웨이 편집부에 들어서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그 서늘함을 다시 만났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 이 관점에서 보면, 감독은 앤디가 처음 등장할 때 의도적으로 그녀를 '이물질'처럼 연출합니다. 세련된 동료들 사이에서 혼자 부피 있는 겨울 코트를 입고 두리번거리는 앤디. 그 장면은 패션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감의 차이, 즉 '나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저는 2004년 봄 상하이 푸동 공항에서 그 감각을 몸으로 알았습니다. 국내에서 이십 년 가까이 쌓아온 것들이 낯선 도시에서는 아무 무게도 갖지 못한다는 것. 그 허탈함은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내 안으로 파고듭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앤디가 그 이물감을 극복하는 방식입니다. 그녀는 서서히 그 세계의 언어를 배우고, 옷을 바꾸고, 표정을 바꿉니다. 영화는 이것을 코스튬(costume) 변화를 통한 심리 서사로 표현합니다. 화려해질수록 앤디의 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갑니다. 이 연출 방식은 단순한 패션 변신이 아니라 정체성 침식의 시각적 기록입니다.

나라면 어땠을까요? 저는 중국에서 조직이 원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다듬어가면서,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낯선 얼굴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얼굴이 나쁜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가 꿈꾸던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앤디의 눈에서 빠져나가던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설명보다 먼저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고독은 도망칠 수 없을 때 가장 솔직해진다

이 영화의 진짜 중심은 앤디가 아니라 미란다입니다.

메릴 스트립은 2007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이 역할로 수상했는데, 그 수상이 납득되는 이유는 그녀가 '악역'을 연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서브텍스트(subtext) — 대사 이면에 숨겨진 감정과 의미 — 로만 연기합니다. 목소리를 낮출수록, 표정이 잠잠해질수록, 미란다는 더 무서워집니다. 저는 중국에서 몇몇 외국계 임원들을 만나며 그 방식을 배웠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는 것. 그 조용함 뒤의 구조를 읽어내는 것이 생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중반, 미란다가 호텔방 침대에 혼자 앉아 눈물을 닦는 장면이 나옵니다. 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고개를 숙이는 그 짧은 장면. 저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진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는 사람이 홀로 치르는 고독.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그림자입니다. 성공이 커질수록 그 그림자도 함께 커진다는 것을, 미란다는 알고 있고, 그래서 더 냉정해질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버스를 운전하다 보면 고독의 결이 달라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심야 노선, 빈 좌석들, 창밖으로 흐르는 서울 불빛. 그 시간에 저는 성공이라는 단어를 가끔 다시 정의합니다. 저는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재구성의 힘이 회복이라고 배웠고, 고독은 그 재구성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도망칠 곳이 없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에게 솔직해집니다.

에밀리(에밀리 블런트)와 나이젤(스탠리 투치)의 이야기가 너무 가볍게 처리되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앤디의 서사가 "나는 이 세계를 떠난다"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면서, 그 세계 안에 남은 사람들은 배경처럼 처리됩니다. 버스 안을 스쳐 지나가는 수백 명의 승객 각자에게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저로서는, 그 구조가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나이젤이 파리에서 기회를 빼앗기는 장면에서 그가 흘리는 짧은 침묵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인 감정이었습니다.

"내려놓음"이 가장 강한 선택이 되는 순간

2023년 9월 28일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성령충만의 경험을 하던 그날, 저는 오래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감각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 이후 세상이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앤디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미란다의 전화를 받지 않고 돌아서는 그 선택.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성장의 증거로 읽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그 선택이 용기라면, 그 용기의 값은 그녀가 얻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포기한 것에 있습니다. 미란다의 신뢰, 화려한 미래, 그 세계 안에서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것.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상실이기도 합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안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진짜 선택입니다.

신앙을 갖게 된 뒤 저는 내려놓음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방향의 전환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자리는 세상의 성공으로 메울 수 없다는 것. 미란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녀가 눈물을 닦던 장면을 저는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것의 눈물이었습니다.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를 쌓아가는 방식을 보면, 감독은 의도적으로 앤디의 선택을 영웅적으로 연출하지 않습니다. 미란다가 앤디의 뒷모습에 보내는 짧은 미소. 그것은 승인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모호함이 이 영화를 단순한 성장 서사에서 꺼내어 올립니다.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사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습니다.

KT Tunstall의 "Suddenly I See"가 흘러나오며 앤디가 새 출발을 향해 걷는 마지막 장면은, 보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건드립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경쾌함보다 무게를 먼저 느꼈습니다. 새벽 차고지에서 시동을 걸 때의 그 감각과 닮아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이지만, 가볍지 않은 시작.

이 영화는 패션에 관심 없는 분들께도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어느 조직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느낌을 받아본 적 있는 분, 성공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 번쯤 멈춰 선 적 있는 분, 그리고 무언가를 내려놓는 것이 두렵지만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분께. 이 영화는 그 감각을 정확하게 담고 있습니다.

화려하게 시작해서 조용하게 끝나는 영화입니다. 그 조용함 안에 꽤 오래 남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참고:
로튼 토마토 - The Devil Wears Prada
골든글로브 공식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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