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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걸: 우먼 오브 투모로우]영웅은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시작된다, 고통, 의지

by 어성초님 2026. 6. 16.

슈퍼걸: 우먼 오브 투모로우

2004년 처음 중국 땅을 밟던 날 밤, 저는 고층 아파트 창문 너머로 낯선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나는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를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슈퍼걸: 우먼 오브 투모로우》를 보는 내내 그 밤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영웅은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시작된다

카라 조렐(밀리 바비 브라운)은 슈퍼맨의 사촌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혈통을 영웅성의 근거로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는 카라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먼저 보여줍니다. 적색 태양 아래 능력조차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낯선 행성, 복수를 위해 따라붙는 소녀 루시. 카라는 선택받아서 걷는 게 아니라, 그냥 걷기로 선택해서 걷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캐릭터 에이전시(character agency)란 주인공이 외부의 힘이나 운명에 이끌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서사 장치를 의미합니다. 기존 DC 영웅물이 '선택받은 자의 고뇌'라는 공식에 기댔다면, 이 작품은 그 공식을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캐릭터 에이전시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능력이 있으니 도와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라, 눈앞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서 발을 내딛는다는 논리. 그 차이가 이 영화를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 이상으로 만드는 지점입니다.

저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기 피해로 중국 MRO 사업이 무너졌을 때, 누가 시켜서 쿠팡 새벽 알바를 시작한 게 아닙니다. 아무도 제 다음 걸음을 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배민 배달을 하고, 버스 면허를 따고, 보험을 공부했습니다. 그 선택들이 모여서 지금의 제가 됐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행성에서, 아무런 보상 약속도 없이 한 아이의 복수 여정에 동행할 수 있었을까요. 카라의 그 첫걸음이 결국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고통은 영웅을 부수거나 단련시킨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카라의 분노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그녀는 분노하지만, 그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감정 서사(emotional arc)' 란 인물이 특정 감정 상태에서 출발해 내적 갈등과 외적 사건을 거쳐 변화하는 심리적 곡선을 의미합니다. 카라의 감정 서사는 분노→냉각→선택→연대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단순한 복수극과 이 영화를 구별 짓는 핵심입니다.

다만 솔직히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루시의 복수심과 카라의 도덕적 기준이 충돌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순간이어야 하는데, 그 갈등이 생각보다 빨리 봉합됩니다. 두 사람의 감정 충돌을 조금 더 오래 끌었다면 주제의 무게가 훨씬 깊어졌을 겁니다. 아깝습니다.

심리상담 공부를 하면서 배운 개념 중에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반드시 인간을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고통이 오히려 이전보다 단단한 자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는 심리학적 개념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APA). 카라가 고향 행성을 잃은 상실을 딛고 서 있는 방식, 그리고 루시가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이 정확히 이 PTG의 서사 구조와 겹칩니다.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관객인 저는 계속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녀가 루시 곁에 머문 것은 강해서가 아닙니다. 그 고통이 낯설지 않아서입니다.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종류의 동행이 있습니다. 저 역시 허리디스크와 난청을 안고, 새벽 네 시간 수면으로 핸들을 잡을 때, 비슷한 처지의 승객이 타면 말 한마디 없이도 뭔가 통하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요.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영웅을 완성한다

밀리 바비 브라운의 연기에 대해 저는 조심스럽게 긍정 평가를 내립니다. 기존의 '귀엽고 강한 소녀' 이미지에서 벗어나, 내면의 피로와 상실을 절제된 표정으로 담아내려는 시도가 분명히 보입니다. 다만 감정이 폭발해야 하는 몇몇 장면에서 절제가 억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차이는 미묘하지만, 보는 사람은 압니다.

여기서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배경·인물의 위치·색조 등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을 의미합니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카라가 흔들릴 때마다 화면을 의도적으로 협소하게 가두고, 그녀가 다시 결심할 때 공간을 넓힙니다. 말이 아니라 공간으로 의지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연출 전략은 《아이, 토냐》에서도 확인되었던 그의 방식이기도 합니다(출처: 영국영화협회 BFI).

2023년 9월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이듬해 세례를 받으면서 저는 처음으로 짐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습니다. 평생 혼자 다 감당해야 한다는 강박을 놓는 것이 약함이 아니라 용기라는 걸,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영화가 말하는 것도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의지란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고 나서도 다시 일어서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다음 목록은 이 영화가 '의지'를 표현하는 세 가지 방식입니다.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몸을 던지는 카라의 행동
-복수를 완성하고 난 뒤에도 멈추지 않는 루시의 눈빛
-결말에서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는 카라의 선택

세 장면 모두 대사보다 침묵이 더 큽니다. 새벽 두 시 서울 외곽 도로를 달릴 때 저도 그 침묵 속에서 비슷한 걸 느낍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늘 내가 이 핸들을 잡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이 영화는 히어로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분께도 권합니다. 특히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혼자 버텨낸 경험이 있는 분, 또는 누군가 곁에 아무 이유 없이 서 있어 준 기억이 있는 분이라면 카라의 동행이 다르게 닿을 것입니다. DC 리부트의 출발점으로서 완성도는 B+, 그러나 메시지의 무게만큼은 A를 줍니다.

참고:
출처1: 미국심리학회 APA — Post-Traumatic Growth
출처 2: 영국영화협회 BFI — Sight &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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