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소년범 이야기'라고 해서 뻔한 눈물과 반성의 서사겠거니 싶었습니다. 그냥 틀었습니다. 2022년 새벽,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던 날이었습니다. 버스 차고지에서 돌아와 씻지도 못한 채 소파에 쓰러졌고, 몸을 움직이기 싫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리모컨을 눌렀습니다. 그러다 동이 틀 때까지 화면을 끄지 못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소녀심판>(2022)은 소년부 법원을 배경으로, 소년범 처벌과 교화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판사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홍종찬 감독이 연출하고, 김혜수·이성민·이정은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소년범을 혐오한다고 공언하는 심혜린 판사가 소년부에 배치되면서, 그 냉정한 시선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는 구조입니다. 2022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작품상과 김혜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드라마는 내내 감정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 절제가 오히려 보는 내내 숨을 조였습니다.
"새벽 운전대 위"에서 마주한 나 자신

심야 노선을 달리다 보면 막차를 탄 10대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술 냄새를 풍기거나, 멍하게 창밖을 보거나, 울다 잠든 아이들. 뭘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백미러로 자꾸 눈이 갑니다.
<소녀심판>의 법정 장면은 그 백미러 감각과 닮아 있었습니다. 심혜린 판사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무표정 안에 무언가를 꾹 눌러 담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따라왔습니다. 홍종찬 감독은 이른바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의 구성)을 통해 그 감정을 법정 공간 자체에 녹여냈습니다. 높은 판사석, 좁은 피고인 자리, 그 사이의 공백. 카메라는 과잉 없이 그 공간적 긴장을 담아냅니다.
모경훈 음악감독의 현악 중심 OST도 같은 결을 공유합니다. 현이 울리는 게 아니라 버티는 느낌, 그게 드라마 전체의 정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이 아니라, 침묵의 밀도를 높이는 음악입니다. 새벽 운전대를 잡고 아무도 없는 도로를 달릴 때 느끼는 그 고요함과 같은 온도였습니다. 외롭지 않은데 외로운 것 같은, 혼자인데 무언가와 연결된 것 같은 그 감각.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자꾸 자문한 건 이겁니다. "심혜린 판사는 왜 소년범을 혐오한다고 먼저 선언했을까?" 방어인지, 상처인지. 저도 버스 운전을 처음 시작했을 때, 사람들을 조금 거리를 두고 대했습니다. 밤마다 낯선 얼굴들을 태우고 달리다 보면 그게 자기 보호였던 것 같습니다. 심혜린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독은 도망칠 수 없을 때 가장 솔직해진다
2004년 처음 중국 청도에 에 발을 디뎠을 때, 저는 낯선 도시에서 언어도 인맥도 아무것도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대기업 주재원이라는 직함이 있었지만, 그게 그 도시에서 저를 지켜주지는 못했습니다.
드라마 속 소년범들의 얼굴을 보면서 중국 공장 인근 도시들을 다닐 때 마주쳤던 10대 공장 노동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농촌에서 올라온 어린아이들의 눈빛. 그 아이들이 범죄로 빠져들었다면, 그게 순전히 개인의 잘못이었을까. 사회가 먼저 그 아이들을 버린 게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소녀심판>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꺼냅니다.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과 구조) 측면에서 이 드라마는 용기 있는 선택을 했습니다. 피해자 가족의 눈물이 나 가해자의 뒤늦은 반성을 과잉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절제가 오히려 사회 구조적 책임이라는 주제를 더 선명하게 부각합니다. 감정으로 가리지 않기 때문에, 질문이 그대로 남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저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이었을까."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면서 배운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처벌보다 관계 회복과 재사회화에 초점을 맞추는 사법 철학)' 개념이 드라마 속 법정 장면에서 훨씬 선명하게 살아났습니다. 교과서에서 읽을 때는 추상적이었는데, 심혜린 판사가 아이 하나를 앞에 두고 판결을 내리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 개념이 얼마나 실제적인 무게를 가진 것인지 처음 실감했습니다.
저는 이성민이 연기한 차태주 판사 캐릭터에서 더 깊은 진실을 봤습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흔들리는 인간,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 시스템에 의심을 품는 인간. 중국에서 대기업 조직의 논리와 제 판단이 충돌하는 순간마다 저도 차태주처럼 조용히 버텼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캐릭터가 더 입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고독은 시끄럽지 않습니다. 가장 조용한 순간에 가장 솔직해집니다.
-회복적 사법: 범죄자 처벌보다 피해 회복과 공동체 재통합에 초점
-재사회화: 범죄자가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과정
-소년부 법원: 만 10~19세 미만 소년 사건을 전담하는 법원 기관
"내려놓음"이 가장 강한 선택이 되는 순간
2023년 9월 성령충만을 받고 나서 이 드라마를 다시 한 번 돌려봤습니다. 그전에 봤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장면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가해자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장면들에서, 저는 용서와 속죄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이 저 같은 사람도 붙드셨다는 사실을 막 실감하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어른들의 몸짓이 전과는 다르게 가슴에 닿았습니다. 같은 장면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달라지면 장면도 달라진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홍종찬 감독의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이야기가 시작·전개·결말로 쌓여가는 방식)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처벌이 맞는가, 교화가 맞는가. 어른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드라마는 그 질문을 꺼낸 채 시청자에게 돌려줍니다. 그 열린 결말이, 오히려 내 안에서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심혜린 판사 캐릭터가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부분이 초반엔 조금 도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다 보면 세상이 그렇게 명확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걸 매일 느낍니다. 사람은 한 가지 감정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작위성이 후반부 가면서 해소되기는 하지만, 처음 몇 화에서 걸렸던 것도 솔직히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다시 권하게 되는 건, '내려놓음'이 결코 약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이 드라마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판결을 내리면서 자기 확신을 내려놓는 판사, 분노를 내려놓고 아이를 다시 보는 어른. 그 장면들이 새벽 운전대 위에서 수없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소년범죄, 사법 시스템,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조적 책임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보시길 권합니다. 눈물로 설득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질문으로 남겨두는 드라마를 원하는 분께 특히 추천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 사회복지나 교육 분야에 계신 분, 그리고 새벽에 혼자 무언가를 곱씹는 습관이 있는 분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