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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2013년 영어 데뷔작으로, 크리스 에번스·송강호·틸다 스윈턴 주연. 빙하기로 폐허가 된 지구를 순환하는 열차 안 계급투쟁을 그린 SF 드라마로, 국내 최고 제작비 437억 원을 투입해 봉준호 특유의 계급 풍자와 묵직한 철학을 스케일 있게 담아냈습니다.
버스 운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밤이었습니다. 피곤하면 쉬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날은 화면을 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튼 설국열차. 처음 봤을 때는 중국 웨이하이에서 공장을 관리하던 시절, 한국 콘텐츠가 그리워 인터넷으로 뒤늦게 찾아봤는데 그때는 깊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아니, 제가 달라져 있었던 것이겠지요.
꼬리칸 사람이 본 계급의 속살
저는 매일 서울 시내버스를 몹니다. 기점에서 종점, 종점에서 기점. 노선은 정해져 있고 방향은 직선입니다. 설국열차의 그 선형(線形, 앞뒤로만 이어진 일직선 구조) 공간이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열차든 버스든, 달리는 공간 안에는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존재합니다. 앞자리에 정장 차려입고 노트북 두드리는 분, 맨 뒷자리에 몸을 구겨 넣고 조는 일용직 아저씨,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저. 운전석은 가장 앞이지만, 사실 저도 어딘가의 꼬리칸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 꼬리칸 사람들이 먹는 검은 단백질 블록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의 충격. 저는 그 장면에서 2004년 산동성 청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낯선 땅에 내리자마자, 아이들이 현지 음식을 며칠째 먹지 못했습니다. 한국 식재료는 구하기 어려웠고, 아내는 배앓이를 하면서도 아이들 밥상을 챙겼습니다. 1999년 위암 수술을 한 그 몸으로 말입니다.
살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것에 적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꼬리칸 사람들이 그 블록을 입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요.
봉준호 감독은 이 계급 구조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 칸으로 갈수록 조명이 밝아지고, 공기가 달라지고, 음식이 풍성해집니다. 카메라는 꼬리칸에서 낮고 좁게 앉아 인물들을 찍다가, 앞 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만으로 계급의 낙차를 보여주는 연출입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도 관객은 이미 압니다. 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좁게 살아왔는지를.
당신은 지금 어느 칸에 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눈빛 하나로 무너지는 체제의 균열
크리스 에번스가 연기한 커티스는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와 같은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다부진 몸집은 그대로이되, 눈빛만큼은 내내 무언가를 짓누르고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꼬리칸의 어둠 속에서 동료들을 이끌 때, 그의 눈에는 희망이 아니라 결의와 죄책감이 뒤섞여 있습니다. 앞 칸으로 나아갈수록 그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윌포드 앞에 서서 과거의 일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에번스는 대사보다 침묵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목소리는 낮고 떨리지 않지만, 턱 근육이 미세하게 씰룩이고 눈동자는 아래를 향합니다. 수치심을 몸 전체로 눌러 담은 연기였습니다.
틸다 스윈턴의 메이슨 총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충격을 줍니다.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만든 분장, 과장된 발음, 어딘가 어색하게 높고 찌르는 듯한 목소리. 그러나 그 과장 속에 공포가 숨어 있습니다. 꼬리칸 사람들에게 "각자의 자리가 있다"라고 훈계할 때, 그녀는 단상 위에서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릅니다. 몸짓 자체가 계급의 언어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이 캐릭터를 마가렛 대처에서 영감 받아 설계했다고 직접 밝혔고, 틸다 스윈턴 역시 대처의 고향인 영국 북부 공업지대 억양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과장이 단순한 희화화가 아니라 체제의 민낯을 정확히 겨냥한 것임을 알고 나면, 이 캐릭터가 다르게 보입니다.
그리고 송강호의 남궁민수.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열차 '밖'을 보고 있는 인물입니다. 다른 이들이 앞 칸이냐 뒤 칸이냐를 다투는 동안, 그는 문 너머의 세계를 봅니다. 중독자의 흐릿함과 예언자의 선명함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눈빛. 느슨해 보이지만 절대 이완되지 않는 그 연기가 이 영화의 진짜 반전을 가능하게 만든 버팀목이었습니다.
저는 1984년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하던 해를 생각했습니다. 생산관리 부서에서 공장합리화, 원가절감을 외치며 윗사람 눈에 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 시절엔 앞 칸으로 가면 뭔가 다른 세상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커티스가 칸막이 문 하나하나를 뚫고 나아가듯이. 그런데 중국에서 15년을 보내고, 사업이 무너지고, 사기를 당하고, 주식 리딩방에 속아 없는 돈마저 날린 뒤 한국으로 돌아와 버스 운전대를 잡았을 때, 저는 다시 꼬리칸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한 번도 앞 칸에 도달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앞 칸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이, 그 칸에 도착했을 때 과연 행복으로 이어질 거라 확신하십니까?
열차를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은 저에게 오래 남아 있습니다. 열차 자체를 멈추는 것. 시스템 밖으로 나가는 것. 저는 그것이 도피가 아니라 진짜 용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르코 벨트라미가 담당한 음악은 이 엔딩을 더 서늘하게 만듭니다. 폭발 이후의 정적 속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슬픔도 승리도 아닌, 어떤 원점의 감각을 불러옵니다. 열차가 멈추고 눈 위에 두 아이가 서 있는 그 장면에서, 음악은 오히려 한 발 물러섭니다. 감독은 관객에게 빈 공간을 줍니다. 무엇을 채울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기면서.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체제 안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해방인가, 아니면 체제 자체를 멈추는 것이 해방인가."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설국열차는 국내 관객 934만 명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링크) 437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영어권 합작 영화로서, 봉준호의 이름을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저는 2025년 12월 21일, 40년 넘게 피워온 담배를 끊었습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담배 농사를 지으며 자랐고, 어른들 몰래 잎담배 냄새를 맡던 그 시절부터 이어져 온 습관이었습니다. 금연은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하나님께 매달려 붙잡은 결단이었습니다. 열차 시스템 안에서 칸만 바꾸려 하다가, 결국 열차 자체에서 내리는 선택. 설국열차의 엔딩이 그 결단과 겹쳐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화는 말합니다. 선형 구조 위에서 앞만 향해 달리는 것이 때로는 순환(循環, 같은 궤도를 반복해서 도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고. 지구 표면을 일 년 내내 돌고 도는 열차처럼,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가는 척하면서 제자리를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IMDb에 따르면 설국열차는 7.1점(10점 만점)을 기록하며 높은 평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출처: IMDb, 링크) 단순한 SF 액션이 아니라 계급·체제·인간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그 점수 이상의 무게를 가진 영화입니다.
설국열차는 볼 때마다 다른 영화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보는 사람이 달라지는 영화입니다. 20대에 보면 커티스의 용기가 눈에 들어오고, 40대에 보면 길리엄의 선택이 무겁게 남고, 60대에 접어든 저에게는 남궁민수의 눈빛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밖을 보고 있었던 그 눈빛.
- 사회 구조와 계급에 관심 있는 분
- 액션보다 철학적 여운을 찾는 분
- 봉준호의 기술적 연출을 눈여겨보고 싶은 분
이 세 조건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오늘 밤 다시 한번 틀어볼 만한 영화입니다.
★★★★☆ (4/5)
❓ 자주 묻는 질문
Q. 설국열차 결말에서 열차를 폭파시킨 이유가 무엇인가요?
A. 남궁민수는 처음부터 열차 '앞 칸'이 아닌 열차 '밖'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관찰 끝에 외부 기온이 서서히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문을 열기 위해 폭약을 모아 왔습니다. 열차를 멈추는 것은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겠다는 선택이며, 그 폭파로 두 아이가 눈 위에 살아남아 북극곰을 바라보는 장면이 마지막 희망의 씨앗으로 남습니다.
Q. 설국열차 실화 기반인가요, 원작이 있나요?
A. 실화가 아닌 프랑스 그래픽 노블(만화) 《르 트랑스페르 스네 주(Le Transperceneige)》가 원작입니다. 1982년 자크 로브와 장-마르크 로셰트가 발표한 작품으로, 봉준호 감독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는 원작의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커티스라는 새로운 캐릭터와 송강호의 역할을 추가해 봉준호 특유의 계급 서사로 재창조했습니다.
Q. 설국열차 러닝타임과 관람 등급은 어떻게 되나요?
A. 러닝타임은 126분(2시간 6분)이며, 국내 기준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폭력적인 전투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계급과 생존에 관한 묵직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어린 자녀와 함께 보기보다는 10대 중반 이상이 적합합니다.
Q. 설국열차에서 메이슨 총리 캐릭터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건가요?
A.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직접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모티브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틸다 스윈턴 역시 이를 알고 대처의 고향인 영국 북부 공업지대 억양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과장된 말투 뒤에 숨어 있는 냉혹한 체제 수호자의 모습이, 특정 정치인을 향한 날카로운 풍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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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 사회 하층부에서 살아남으려는 인물의 날것 그대로의 폭력과 감정을 그린 작품으로, 귀공자에서 느껴지는 거친 생존 본능과 맥락이 닿는다.
관상 (2013) — 인간의 내면이 외면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다른 장르적 문법으로 탐구한 작품입니다. 똥파리가 눈빛과 몸짓으로 내면을 읽어냈다면, 관상은 그 독법(讀法) 자체를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