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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운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대개 밤 열두 시가 넘습니다. 씻고 소파에 기대면 그제야 허리가 좀 풀리는데, 그 시간에는 무거운 드라마보다 시원하게 치고받는 액션 한 편이 딱입니다. 유튜브를 뒤적이다 「생사위기」 예고편을 봤는데, 조문탁이 좁은 기내 통로에서 맨몸으로 테러리스트를 상대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순간 "아, 이 양반이구나" 싶었습니다. 황비홍. 2004년 청도 공장 숙소에서 혼자 밤을 보내며 케이블 TV로 보던 바로 그 배우였거든요.
대사 없이 눈빛 하나로 모든 것을 전달한 조문탁의 연기
조문탁이 연기하는 장즈융은 전직 특수부대 교관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전사의 용맹함이 아닙니다. 제가 가장 주목한 장면은 테러리스트들이 기내를 장악하는 순간, 장즈융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좌석에 앉아 눈만 움직이는 장면입니다.
그 눈빛이 압권이었습니다.
차갑게 상황을 계산하는 냉정함과, 바로 옆에 앉은 가족을 향한 공포와 보호 본능이 동시에 스쳐 지나갑니다. 입은 굳게 다물었고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 턱 근육의 긴장, 숨을 한 박자 늦게 내쉬는 타이밍 조문탁은 이 모든 것으로 내면을 전달합니다. 대사 톤(tone, 말의 높낮이와 감정 색깔)이나 대사 호흡(呼吸, 말과 침묵의 리듬)이 없어도 관객은 압니다. 저 남자가 지금 얼마나 많은 것을 계산하는지, 동시에 얼마나 두려운지를.
격투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내 좁은 통로에서 좌석 팔걸이를 방패 삼고 짐칸 손잡이를 발판 삼아 몸을 던지는 동작들은 화려하기보다 처절합니다. 황비홍 시절의 우아한 무술과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이건 보여주기 위한 무술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상을 입고도 멈추지 않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당겼습니다.
여러분은 침묵이 대사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던 장면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에서 그걸 다시 경험했습니다.
좁은 기내 공간을 공포의 무기로 바꾼 마초성 감독의 연출
마초성 감독은 황비홍과 첨밀밀의 촬영감독(Director of Photography, 영상의 빛과 구도를 총괄하는 역할) 출신답게 공간을 다루는 감각이 남다릅니다. 일반적인 액션 영화라면 넓은 공간에서 화려한 격투를 보여줬겠지만,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공간을 죄어옵니다.
기내 통로는 두 사람이 옆으로 서기도 빠듯합니다. 감독은 바로 이 제약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를 삼각대 없이 손으로 들고 찍는 기법) 촬영으로 좌석 사이를 누비는 화면은 관객을 기내 안에 함께 가둬버립니다. 넓은 공간에서의 액션은 보는 사람에게 도망칠 여지를 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여지를 처음부터 빼앗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에 배치된 인물·조명·소품 등 모든 시각 요소의 총체)을 보면 더 영리합니다. 좌석 등받이, 안전벨트 버클, 비상구 표시등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는 기내 소품들이 장즈융의 손에 닿는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안전을 위해 존재하던 것들이 생존 도구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꽤 설득력 있게 연출됩니다.
만약 제가 그 비행기에 탔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공장에서 30년 가까이 몸을 쓴 사람이지만, 테러리스트 앞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 까요. 그래서 화면 속 장즈융의 선택이 더 무겁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셨을 것 같으세요?
웨이하이 숙소의 밤, 그때 그 눈빛이 지금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젊을 때 황비홍을 처음 봤을 때는 단순히 통쾌한 무협 오락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60대가 되어 조문탁을 다시 마주하니, 같은 배우가 전혀 다른 무게로 느껴졌습니다.
처음 웨이하이에 부임하던 2004년 가을, 가족은 아직 한국에 있었고 저는 공단 옆 숙소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말이 주재원이지, 퇴근하면 갈 곳도 없었고 중국어도 서툴러 편의점 하나 들르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 적막한 방에서 유일한 낙이 TV였는데, 마침 황비홍 시리즈가 방영 중이었습니다. 중국어 자막이 가득한 화면이지만 무술 동작만으로도 내용이 읽혔고, 조문탁의 그 단단하고 묵직한 눈빛이 왠지 위로가 됐습니다.
다음 날이면 수백 명 공원(工員, 생산직 현장 작업자)들 앞에서 당당히 서야 하는 저에게, 화면 속 그가 혼자 수십 명을 상대로도 꺾이지 않는 모습은 그냥 오락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정신 무장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다시 본 그의 눈빛은, 같은 눈빛인데 다르게 읽혔습니다. 젊을 때는 "저렇게 강해지고 싶다"라고 봤다면, 지금은 "저 사람도 두렵구나, 그래도 버티는구나"로 보였습니다. 웨이하이 공장에서 명절 전날 밤, 설비가 멈추고 부품은 없고 기술자는 "설 지나고 봅시다"라고 할 때 혼자 매뉴얼을 펼쳤던 그 밤이 겹쳐 보였습니다. 두렵지만 멈출 수 없는 상황. 장즈융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매일 아침 헬스장에서 러닝을 하면서 허리 통증과 씨름하고, 밤에는 N잡 준비를 하면서 다시 일어서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 속 "폭탄 세 개, 모두 살려야 한다"는 미션이, 단순한 액션 영화 설정으로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버텨내야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버텨냅니다. 이 영화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러닝타임 90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끝납니다. 하루를 꽉 채우고 돌아온 저녁, 머리를 비우고 싶은데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는 영화는 싫은 분들에게 딱 맞습니다. 특히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어딘가에서 버티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 그 이상으로 느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별점: ★★★★★ (5/5)
추천 대상: 시원한 액션을 원하지만 빈 껍데기는 싫은 분, 조문탁 팬, 중화권 영화에 관심 있는 분, 하루 끝에 가볍게 한 편 보고 싶은 분.
참고 및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