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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2002년작 《복수는 나의 것》은 송강호·신하균·배두나 주연의 복수 3부작 첫 번째 작품으로, 악당 없이 선의에서 출발한 비극이 어떻게 모두를 파국으로 이끄는지를 건조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분노보다 허탈에 가까운 복수의 실체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싶은 관객에게 권한다.
버스 핸들을 내려놓고 퇴근하던 어느 저녁, 유튜브 알고리즘이 영상 하나를 띄워줬습니다. 썸네일에 박찬욱, 그리고 "메인 빌런이 없는 복수물"이라는 문구. 복수물에 빌런이 없다는 말이 머릿속에 걸려서, 그날 밤 바로 OTT를 켰습니다. 2002년작이니 제가 청도 주재원으로 발령받기 꼭 2년 전 영화더군요.
선의로 시작된 복수의 지옥
이 영화는 악의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복수물과 완전히 다릅니다. 농아인 류(신하균)는 신장병으로 죽어가는 누나를 살리기 위해 불법 중개인에게 자신의 신장과 수술비 1,000만 원을 건넵니다. 돌아온 건 빈손뿐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저는 중국 MRO 사업을 2019년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재기를 꿈꾸던 시절에 지인 소개로 유사투자 사기에 걸렸습니다. 처음엔 "설마 내가 속겠어" 했습니다. 그런데 당합니다. 류가 중개인 앞에서 빈손으로 돌아서는 그 표정, 분노인지 허탈인지 수치심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 얼굴저는 그게 어떤 표정인지 온몸으로 압니다. 거울 앞에서 비슷한 표정을 지어본 적이 있으니까요.
류는 결국 애인과 함께 중소기업 사장의 딸을 유괴해 몸값을 요구합니다. 악의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선의에 어떤 면죄부도 주지 않습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 동진(송강호)의 복수, 동진을 향한 또 다른 복수연쇄는 끊어지지 않고 모두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됩니다.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에서 설계한 인과율은 근대 심리극의 그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냉정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현실을 넘어선 근본 원리) 인과율입니다. 선의도, 절박함도, 사랑도 그 앞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은 국내외 평단에서 꾸준히 재평가받아 왔으며, 《복수는 나의 것》은 2002년 개봉 당시 메가박스 외 일부 예술 극장에서만 제한 상영됐음에도 칸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았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링크)
말없이 모든 것을 말하는 연기
신하균이 이 영화에서 짊어진 과제는 무지막지합니다. 대사가 없습니다. 소리로 전달되는 말이 없으니 눈빛, 몸의 떨림, 손짓 하나로 감정 전체를 감당해야 합니다. 박찬욱 감독이 청각장애인 역할에 실제 장애인을 캐스팅하려 했으나 수중 촬영 씬의 위험성 때문에 비장애인 배우로 대체했다는 제작 비하인드는, 신하균이 그 역할을 얼마나 정밀하게 준비했어야 하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누나의 병실에서 그가 건네는 시선을 보십시오. 사랑, 죄책감, 무력감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말로 설명됐다면 오히려 싸구려가 됐을 감정입니다. 유괴한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도 미안함이 역력합니다. 악인의 눈이 아닙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의 눈입니다.
중국에서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시절, 저도 거울 속에서 그런 눈을 본 적 있습니다. 청도 공장을 정리하고 웨이하이 사무실도 닫으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창밖을 바라보던 밤들이 있었습니다. 신하균의 눈이 그날 밤의 제 눈과 겹쳤습니다.
송강호는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딸이 죽은 뒤 그가 보여주는 건 분노보다 먼저 무너짐입니다. 눈의 초점을 잃어가는 방식, 걸음이 조금씩 흔들리는 방식, 소리 없이 절제하는 방식—그 절제가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을 만들어냅니다. 배두나의 영미는 몸짓 하나하나가 늘 세상을 향해 삐딱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 각도 하나로 무정부주의자라는 캐릭터 전체가 설명됩니다.
당신은 스크린 속 인물 중 누구의 눈빛에서 자신을 발견하셨습니까?
사기당한 자가 택한 진짜 복수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화면을 끄지 못했습니다. 복수는 완성됐는데 남은 건 시체뿐이었습니다. 이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도 그 분노의 길목에 서본 적 있습니다. 사기를 당한 뒤 상대방 사무실로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밤이 몇 번이었습니다. 두 아들 학비 대고 배우자 병원비 챙기느라 허리가 휘는데, 누군가는 제 돈으로 웃고 있다는 생각에 잠이 안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길을 가면 동진처럼 됩니다. 복수는 완성되는 순간 자신도 무너집니다.
저는 그 분노를 배달 오토바이 핸들에, 버스 핸들에,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 쏟아냈습니다. 2024년 10월부터 매일 회사 헬스장에서 한 시간 이상 뛰었습니다. 허리디스크로 절뚝이던 제가 이제 북한산을 오릅니다. 2025년 12월 21일, 하나님의 힘으로 담배도 끊었습니다. 그게 제가 택한 복수 아닌 복수였습니다.
류의 누나를 보며 배우자 생각이 났습니다. 1999년 위암 판정 때 저는 아직 대기업 직원이었습니다. 류가 할 수 있는 전부를 했듯 저도 그랬습니다. 다행히 배우자는 완치됐고 지금 제 곁에서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누나는 그 사랑 속에서도 눈을 감았습니다. 삶과 영화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인데,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철저히 관찰자의 자리에 놓습니다. 선악을 나누지 않고,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습니다. 폭력 장면조차 건조하게 기록물처럼 찍힙니다. 미장센(mise-en-scène, 화면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의 총체)은 인물을 자주 좁고 어두운 공간 안에 가둡니다. 류의 좁은 반지하방, 동진의 공장 구석—공간 자체가 이미 탈출 불가능한 운명을 암시합니다. IMDb 기준 이 영화는 7.6점을 기록하며 박찬욱 복수 3부작 중 가장 날카로운 작품으로 꾸준히 언급됩니다.(출처: IMDb, 링크)
"복수엔 자비란 없다"는 말은 영화 속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엔딩이 끝나면 그 말이 입안에 남습니다. 감독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것을 전달했다는 게, 이 영화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누가 보면 좋을까요?
- 복수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복수의 허무를 경험하고 싶은 분
- 삶의 어느 시점에 분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분
-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 장편을 처음부터 제대로 보고 싶은 분
쉽게 소화되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 (5/5)
❓ 자주 묻는 질문
Q. 《복수는 나의 것》 결말에서 누가 살아남나요?
A. 주요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사망합니다. 류는 동진의 복수에 목숨을 잃고, 동진은 영미의 동료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영화는 어느 쪽에도 승리를 허락하지 않은 채 끝납니다. 박찬욱 감독이 의도한 결말로, "복수는 완성되어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구조 자체로 전달합니다.
Q. 박찬욱 복수 3부작 순서와 관람 순서는 어떻게 되나요?
A. 제작·개봉 순서는 《복수는 나의 것》(2002) → 《올드보이》(2003) → 《친절한 금자 씨》(2005)입니다. 세 편은 서사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므로 어느 순서로 봐도 무방하지만, 감독의 연출이 심화되는 흐름을 느끼고 싶다면 개봉 순서대로 보는 것을 권합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 가장 절제되고 건조하며, 《올드보이》로 갈수록 스타일이 강렬해집니다.
Q. 신하균은 실제 청각장애인인가요? 어떻게 역할을 준비했나요?
A. 신하균은 비장애인 배우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처음에는 실제 청각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하려 했으나, 수중 촬영 씬의 안전 문제로 신하균으로 결정했습니다. 신하균은 수화와 청각장애인의 발성 방식을 별도로 익혀 촬영에 임했으며, 대사 없이 눈빛과 몸짓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연기로 국내외 평단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Q. 이 영화의 러닝타임과 관람 등급은 어떻게 되나요?
A. 러닝타임은 121분이며, 청소년 관람불가(18세 이상) 등급입니다. 폭력 장면이 사실적이고 건조하게 묘사되어 있어 심리적 자극이 강한 편입니다. 오락용 자극보다 깊은 여운을 원하는 성인 관객에게 적합합니다.
🎬 함께 보면 좋은 영화
- 웰컴투 동막골 — 선의와 순수가 전쟁이라는 폭력 앞에서 어떻게 부서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복수는 나의 것》과 주제가 맞닿습니다. 두 영화 모두 나쁜 사람이 없는데 비극이 일어납니다.
- 안시성 —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연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동막골과 마찬가지로 집단의 생존과 개인의 선택을 다룹니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지켜낸다는 것의 의미"라는 주제가 통합니다.
- 베를린 — 분단과 이념의 충돌을 현대 액션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동막골이 유머와 서정으로 이념의 허망함을 보여준다면, 베를린은 냉혹한 현실 위에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두 편을 연달아 보면 한국 분단 서사의 스펙트럼을 한눈에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