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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핸들을 잡은 지 벌써 6년이 넘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얼굴을 백미러 너머로 봅니다. 어느 오후, 한 중년 남자가 올라타더니 종점까지 내내 주식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정류장마다 멈출 때마다 숫자가 바뀔 때마다 그 표정이 달라지더군요. 종점 가까이에서 그 남자가 핸드폰을 무릎에 탁 내려놓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그 얼굴이, 10년 전 사기 당하던 시절 거울 속 제 얼굴과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일본 영화 〈미친 탐욕〉(원제: 蟲, 2025)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딱 그 남자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원제 '蟲(むし)'은 벌레라는 뜻인데, 탐욕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벌레는 들어올 때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르게 스며들고, 한번 자리 잡으면 속을 조용히 파먹습니다. 소리도 없이, 티도 나지 않게.
창작욕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소유욕이 되기까지
이 영화의 주인공 마사키는 10여 년간 은둔 생활을 해온 영화감독입니다. 대학 친구의 권유로 연극을 보러 갔다가 주연 여배우에게 매료되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 여배우가 마사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툼 끝에 마사키는 그녀를 살해하고 시신을 집에 갖다 놓으며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줄거리만 들으면 엽기적인 범죄물처럼 들리지만, 이 영화가 날카로운 이유는 그 과정을 극도로 조용하고 내밀하게 포착한다는 데 있습니다. 감독이 선택한 가장 예리한 결정은 탐욕을 돈이나 권력이 아닌 창작 욕망(creative obsession,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하려는 집착)으로 치환한 것입니다. 마사키에게 여배우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작품의 재료였던 겁니다. 실내, 골목, 극장처럼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고립된 개인의 심리를 조용히 압박하는 연출은 관객을 마치 공범자처럼 그 집착의 내부에 가둬버립니다.
저는 마사키의 심리를 들여다보며 솔직히 섬뜩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그냥 감독으로서의 욕심, 저 여배우를 내 영화에 써보고 싶다는 창작욕이었겠지요. 그게 집착이 되고, 집착이 소유욕이 되고, 결국 폭력과 파멸로 이어진 겁니다.
나라면 어땠을까요? 저도 중국에서 MRO 사업(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s, 산업용 소모품 및 유지보수 자재 공급 사업)을 하던 시절, 사업이 잘 풀릴 때는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많이를 원했습니다. 2019년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했을 때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그때 한방에 뭔가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벌어진 틈을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수법이 정교했습니다. 처음엔 신뢰를 쌓고, 조금씩 의존하게 만들고, 결국 제 노력과 돈을 싹 들고 사라졌습니다. 마사키가 처음부터 살인마가 아니었듯, 저도 처음부터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 안에 벌레가 들어올 틈이 있었던 겁니다.
혹시 여러분은 무언가에 집착한 나머지, 상대방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잊어버린 경험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100년 전 무성영화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 - 〈탐욕, Greed〉 (1924)
〈미친 탐욕〉을 찾아보다가 자연스럽게 영화 역사상 탐욕을 가장 처절하게 그린 고전,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감독의 무성영화(silent film, 대사 없이 자막과 영상으로만 진행되는 초기 영화 형식) 〈탐욕(Greed)〉(1924)까지 찾아보게 됐습니다.
원작은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의 소설 《맥티그(McTeague)》로, 치과의사 맥티그가 아내의 복권 당첨 이후 돈을 둘러싼 집착과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입니다. 슈트로하임 감독은 원래 9시간짜리 원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스튜디오가 강제로 2시간대로 잘라냈고, 잘린 필름은 영구 소실됐습니다. 그 전설적인 원본을 보지 못한 영화 역사의 공백 자체가, 이 영화가 다루는 탐욕과 상실의 주제와 묘하게 겹칩니다.
이 영화의 결말부는 캘리포니아 데스밸리(Death Valley, 북미에서 가장 건조하고 뜨거운 사막 지대)에서 촬영됐는데, 실제로 섭씨 50도가 넘는 현장에서 찍었다고 합니다. 금화 가방을 끝까지 놓지 못하다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 극한의 공간에서 담아낸 겁니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연출 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영화 데이터베이스 IMDb의 해당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24년 영화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탐욕이란 시대를 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맥티그가 쥔 것은 금화였지만, 오늘 제 버스에 탄 그 남자가 쥔 것은 스마트폰이었고, 마사키가 쥔 것은 여배우의 존재였습니다. 쥔 것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놓지 못하는 인간의 손은 100년째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쥐고 놓지 못하고 계십니까?
사기 피해, 금연, 그리고 60대에 다시 핸들을 잡으며 배운 것
〈미친 탐욕〉의 마사키는 집착을 다스리지 못해 파멸로 갔습니다. 저는 다행히도, 아슬아슬한 고비마다 다른 방향으로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 의지만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사기 피해 후 쿠팡 새벽 배송을 하고, 배민 라이더를 하고, 결국 버스 핸들을 잡으면서, 저는 천천히 제 안의 벌레를 내보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2025년 12월 21일부터 금연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시작한 금연인데, 신기하게도 담배를 끊으면서 다른 집착들도 하나씩 느슨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탐욕과 집착이라는 벌레는 한 군데만 파먹는 게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몸으로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담배를 참을 때와 무언가에 집착을 놓을 때의 내면 감각이 닮아 있더군요. 둘 다 처음엔 손이 떨리고, 다음엔 허전하고, 한참 지나면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배우자는 1999년 위암을 이겨냈습니다. 저는 그 옆에서 건강이라는 게 탐욕 없이 소박하게 지키는 것임을 가장 가까이에서 배웠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 것인 것도 결국 잃어버립니다. 마사키가 그랬고, 〈탐욕〉의 맥티그가 그랬습니다.
나라면 마사키의 자리에서 어느 순간 멈출 수 있었을까요? 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다만 지금은 버스 핸들을 잡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달리는 것이, 어떤 탐욕보다 단단한 것임을 압니다. 탐욕과 집착을 다룬 영화 심층 분석을 더 보고 싶은 분은 한국 영화 평론 매체 씨네 21의 아카이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미친 탐욕〉(蟲, 2025)은 창작·집착·소유욕이라는 세 층위의 탐욕이 어떻게 조용히 한 인간을 허무는지를 섬세하고 불편하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100년 전 〈탐욕〉이 건넨 질문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액션도, 큰 소리도 없지만, 보고 나면 한참 동안 자기 손 안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돈보다 더 깊은 탐욕 인정욕, 창작욕, 소유욕을 자기 안에서 한 번쯤 목격해 본 분이라면 반드시 보시길 권합니다.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약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