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네 시 반, 첫 차 시동을 걸 때마다 저는 잠깐 멍해집니다. 허리가 뻐근하고 귀 한쪽은 늘 먹먹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도시가 저 혼자인 것 같은 이상한 평온이 있습니다. 그날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네 시간도 채 못 자고 일어나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피곤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잠이 완전히 달아났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2023)》는 조셉 쿤 감독이 연출한 SF 스릴러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화제를 모은 작품입니다. 근미래 미국을 배경으로, AI 기술과 클론 기술이 완전히 상용화된 세계에서 K-팝 스타의 복제 클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체성과 소유권 분쟁을 다룹니다. 브라이언 타 이리 헨리, 에반 레이철 우드, 스티브 연이 출연하며, 영화는 팝아트적 색감과 광고 미학을 SF 서사에 뒤섞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잡아끕니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단순합니다. 한국계 K-팝 스타의 AI 클론이 미국 시장에서 상품으로 소비되고, 그 클론이 스스로 감정과 자아를 갖게 되면서 자신을 소유한 자들과 충돌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 드라이버가 클론 아이렌과 얽히고, 영화는 점점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제가 이 영화를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줄거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만들어진 존재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 질문이 새벽 도로의 침묵처럼 오래 귓가에 남았습니다.
"침묵" 속에 담긴 말들을 듣는 법
새벽 첫 차를 몰다 보면 승객이 거의 없습니다. 창밖으로 광고 간판들이 스쳐 지나가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아무도 없는 거리에 빛을 뿌립니다. 누군가의 욕망을 팔고 있는 그 이미지들을 바라보며, 저는 가끔 그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침묵 속에서 광고들은 오히려 더 크게 말을 겁니다.
이 영화의 드라이버 캐릭터가 꼭 그랬습니다. 브라이언 타 이리 헨리가 연기한 드라이버는 대사가 많지 않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에 배치된 인물과 사물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의 존재는 늘 화면의 가장자리에 놓입니다.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가장 많은 것을 듣고 있습니다.
영화는 빠른 편집(fast cutting)을 즐겨 씁니다. 팝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속도로 장면이 교체되고, 형광빛 색감이 눈을 자극합니다. 그런데 드라이버가 혼자 있는 장면에서만큼은 편집이 숨을 고릅니다. 그 대비가 의도적입니다. 세상이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들로 가득 찰수록, 침묵 안에서 버티는 사람의 밀도가 달라집니다.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면서 저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담을 때가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공부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몸으로 먼저 배운 것이지만요. 드라이버가 아이렌을 바라볼 때의 표정 — 말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는 그 눈빛 — 은 대사 열 줄보다 더 명확하게 그의 내면을 전달합니다.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은 이 침묵을 어떻게 읽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답이 나옵니다.
전자음악 계열의 사운드트랙도 이 흐름에 기여합니다.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음악이 배경처럼 공간 전체를 감싸는 방식)가 드라이버의 침묵과 맞물리면서, 화면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순간에 오히려 가장 강한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새벽 도로의 정적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도시 전체가 숨죽이고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산 시간이 가르쳐 준 것
2004년, 처음 중국에 부임했을 때 저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나는 무엇인가.' 현지인들 눈에는 코리안이었고, 한국에 연락을 하면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저를 '중국 간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로 8년을 살았습니다.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 감각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이 영화의 아이렌이 꼭 그랬습니다. 그녀는 한국적 외형을 가졌지만 미국 시장을 위해 설계됩니다.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판매하지만, 그 이미지의 수익은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이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한국도, 미국도, 인간도, 완전한 기계도 아닌.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자료를 보면,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의 해외 수출 규모는 꾸준히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성장의 이면에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개인들이 구조적으로 착취되는 현실이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이 영화가 클론이라는 SF적 장치를 통해 겨냥하는 것은 바로 그 구조입니다. 문화 식민성(cultural colonialism), 즉 한 문화의 이미지는 소비하되 그 주체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 방식.
조셉 쿤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그 사실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내부와 외부 사이 어딘가에서 한국성을 바라보는 시선. 저는 그 시선이 완전히 내부인도, 외부인도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솔직한 한계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착취를 비판하면서 그 이미지를 스크린 위에서 다시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 — 그 모순을 이 영화가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질문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라고 묻는다면 — 저는 이방인으로 산 시간이 저를 어느 편에도 쉽게 서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솔직하게 답할 것 같습니다. 아이렌의 처지를 보며 분노하다가도, 그녀를 소비하는 화면 앞에 앉아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K-팝 산업의 구조적 착취에 관심 있는 분
이방인, 디아스포라 경험을 가진 분
-SF를 통해 현실 사회를 읽고 싶은 분
이 세 유형의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화면보다 훨씬 더 깊이 읽게 될 것입니다.
"희생"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2023년 9월 28일, 저는 성령충만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완전한 언어를 찾지 못했지만, 그날 이후 '내려놓는다'는 것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내가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 패배가 아니라, 더 큰 것을 위한 선택일 수 있다는 감각. 그것이 신앙 안에서 제가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드라이버가 마지막에 하는 선택을 보며 저는 그 감각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렌을 위해 자신을 내던집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인지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습니다.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오래된 이름을 가진 것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변화해 가는 내적 여정)라는 측면에서 보면, 드라이버의 여정은 단순합니다. 처음에 그는 그저 살아남으려 합니다. 중반부까지 그는 아이렌에게 감정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차단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순간, 영화는 가장 중요한 전환을 만들어냅니다. 인간다움이란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감정 때문에 불리한 선택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저는 그 장면에서 꽤 오래 화면을 멈췄습니다.
아이렌은 클론입니다.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두려워하고, 원하고, 붙들리는 방식은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드라이버가 그녀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저는 그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로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증명해 왔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모든 것을 잘 해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후반부의 전개가 다소 급하고, 일부 캐릭터들의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말에서 드라이버가 남기는 침묵은 — 대사도 설명도 없이 — 이 영화 전체를 하나로 꿰어냅니다. 그 침묵은 새벽 도로를 혼자 달리는 사람만이 알 것 같은 방식으로 말을 겁니다.
이 영화는 다음 분들께 추천합니다.
-K-팝 산업과 문화 소비 구조에 관심이 있는 분
이방인의 감각, 정체성의 분열을 경험해 본 분
SF라는 외피 아래 인간다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원하는 분
빠른 영상과 복잡한 감정을 함께 감당할 준비가 된 분
화려하고 빠릅니다. 그런데 오래 남습니다. 새벽에 혼자 보기를 권합니다. 그 시간에만 들리는 말들이 있습니다.
"만들어진 존재가 진짜로 아파한다면, 그것을 무시하는 쪽이 더 인간답지 않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