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네 시, 서울 도심을 달리는 버스 핸들을 잡고 있으면 가끔 이상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모든 것을 갖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이야기. 1987년 극장에서 처음 봤던 영화 한 편이 그 생각과 함께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마스터즈 오브 유니버스》입니다.
야망은 어떻게 영웅을 악으로 이끄는가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이트너의 수호자 히맨(돌프 룬드그렌)이 스켈레터(프랭크 란젤라)의 음모를 막다가 우주 열쇠를 통해 지구로 떨어지고, 낯선 행성에서 평범한 십 대들 과 함께 다시 이트너로 돌아가 최후의 결전을 치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작비는 턱없이 부족했고, 히트너 장면보다 지구의 황량한 교외 장면이 훨씬 긴 이유도 바로 그 예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어떤 처절한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야망이란 무엇인가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던 1987년, 대기업에 입사한 지 몇 해 된 스물두 살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야망이 방향을 잃으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히맨에게도 야망이 있습니다. 이트너를 지키겠다는 야망, 동료를 보호하겠다는 야망. 그런데 스켈레터의 야망은 다른 궤도를 달립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차이가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영화 비평 용어로 말하자면, 히맨과 스켈레터는 전형적인 대립 구도(foil character) 관계입니다. 여기서 foil character란 주인공의 특성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대비되는 성격과 가치관을 지닌 인물을 의미합니다. 히맨이 이타적 의지로 움직인다면, 스켈레터는 야망 그 자체가 인물을 대체해 버린 케이스입니다. 야망이 인간을 소비하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인지, 이 영화는 스켈레터라는 인물을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해골 얼굴. 인간의 얼굴이 지워진 자리에 남은 것.
나라면 어땠을까? 솔직히 말하면, 저도 한때 야망이 방향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사업을 접고, 사기 피해로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떨까 생각한 날이 있었습니다. 히맨이 낯선 지구에서 처음 "여기가 어디냐"라고 물어보는 장면이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다시 움직였습니다. 야망이 아닌 의지로.
지배욕이 빚어낸 스켈레터의 괴물성
프랭크 란젤라의 스켈레터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배우의 존재감이 캐릭터를 압도하는 순간들을 만들어냅니다. 해골 분장 뒤에서도 그는 눈빛 하나로 권력욕과 공허함을 동시에 전달했습니다. 란젤라 본인도 여러 인터뷰에서 스켈레터를 단순한 악당이 아닌 '비극적 인물'로 접근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출처: The A.V. Club 인터뷰).
지배욕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힘을 갖고 싶은 욕망이 아닙니다. 지배욕은 타인의 자유 의지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심리입니다. 스켈레터가 이트너의 우주 성을 점령한 뒤 선언하는 장면, "이제 우주의 모든 힘이 나에게 속한다"는 대사는 그냥 악당의 허풍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정받고 싶었지만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존재의 최후 몸부림처럼 들립니다.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면서 제가 배운 개념 중에 권력 역동(power dynamics)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 역동이란 관계 안에서 힘이 어떻게 작용하고 이동하는지를 분석하는 개념으로, 상담이나 사회복지 현장에서 약자와 강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쓰입니다. 스켈레터의 행동을 이 틀로 보면, 그는 평생 권력의 주변부에서 배제된 존재였고, 그 상처가 지배욕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온 것이라 읽을 수 있습니다. 악당을 동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심리 구조를 이해하면 이 영화가 단순한 선악 대결극 이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이 왜 스켈레터를 죽이지 않고 돌아섰는가? 마지막 결전에서 히맨은 스켈레터를 제압하지만, 결국 스켈레터는 자신의 지배욕이 만든 함정에 스스로 빠집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선징악이 아닙니다. 지배하려는 욕망은 결국 그 욕망을 가진 자를 삼킨다는 오래된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저는 버스를 달리며 이따금 그 결말을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지배하려 했던 시절의 제 모습도 그 안에 조금은 있었다고.
권력 앞에서 인간성은 끝내 무너지는가
이 영화에는 코트니 콕스가 연기하는 줄리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영화 비평에서 이런 캐릭터를 종종 맥거핀(MacGuffin)이라 부릅니다.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붙이는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서사를 갖지 못하는 장치를 의미합니다. 줄리와 케빈은 우주 열쇠를 매개로 이야기에 끌려들어 가지만, 그들이 이 이야기에서 진짜 하는 역할은 히맨이라는 이방인의 '인간성 회복 거울'입니다. 히맨은 지구의 평범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느낍니다.
인간성. 저는 이 단어가 이 영화 안에서 가장 소중하게 다뤄지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은 힘 앞에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갖고 있을 때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히맨은 지구에서 힘을 잃은 채 허둥댑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오히려 그를 가장 인간적으로 만들어줍니다. 반면 스켈레터는 모든 힘을 손에 쥐는 순간, 마지막 남은 인간성마저 사라집니다.
2023년 9월, 저는 성령충만을 경험했고, 2024년 9월에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히맨이 검을 들어 하늘을 향해 외치는 장면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우주의 힘(Power of Grayskull)"을 선언하는 그 순간은, 단순한 변신 장면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큰 소리로 말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저는 이제 압니다. 세례가 저에게 그런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1987년 냉전의 끝자락에 만들어진 맥락도 중요합니다. 절대 악에 맞서는 절대 선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당시 수많은 아이들에게 "버텨야 한다"는 감각을 심어줬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대중 신화의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조지프 캠벨의 영웅 서사 연구가 설득력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출처: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Joseph Campbell — MythologyFoundation.org). 히맨의 이야기는 그 원형 서사의 아주 날 것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새벽 버스 핸들을 잡고 있을 때, 저는 가끔 이 영화를 떠올립니다. B급 판타지라 불러도 좋습니다. 예산 부족이 티 나는 세트도, 어색한 장면 전환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에서 한 번이라도 모든 것을 잃어본 적 있는 분,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버텨본 적 있는 분, 아침이 오기 전까지 그냥 핸들을 잡고 달려본 적 있는 분께 이 영화를 권합니다.
참고:
출처1: Frank Langella on Skeletor — The A.V. Club
출처 2: Joseph Campbell's Monomyth — Joseph Campbell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