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포스터만 봤을 때는 그냥 '청춘 농구 영화'겠거니 했습니다. 잘생긴 배우들이 코트 위에서 뛰고, 마지막에 극적으로 이기고, 눈물 한 방울 짜나는 그런 공식적인 스포츠 영화. 솔직히 예고편도 제대로 안 봤습니다
그런데 처음 본 건 새벽 버스 운행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 두 시였습니다. 씻지도 못한 채 소파에 기댔는데, 채널을 돌리다 화면이 눈에 걸렸습니다. 허름한 체육관, 먼지 날리는 코트,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아이들. 뭔가 달랐습니다. 결국 끝까지 봤습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는데도.
《리바운드》는 2012년 실제 부산 중앙고 농구부 이야기입니다. 전국대회 상위권은커녕 동네에서도 이기기 힘들었던 만년 꼴찌 팀이, 갑자기 부임한 신인 코치와 함께 전국 4강까지 올라간 실화입니다. 감독은 장항준, 주연은 안재홍이 코치 역할을 맡았고, 나머지 선수들은 신인 혹은 비전문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2023 대종상에서 이신영이 신인남우상을 수상했을 만큼, 연기의 결도 예상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침묵이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할 때
저는 새벽에 버스를 몹니다. 손님이 없는 구간,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도로 위에서 핸들을 잡고 있으면 이상한 감각이 옵니다. 혼자라는 감각이요. 근데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조용함 안에서 어떤 것들이 선명해집니다.
《리바운드》는 말이 많은 영화가 아닙니다.
장항준 감독은 핸드헬드 카메라(hand-held camera, 삼각대 없이 촬영자가 직접 손에 들고 찍는 방식)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화면이 약간 흔들리고, 앵글이 불규칙하고, 빛이 고르지 않습니다. 처음엔 조금 어지러울 수 있는데, 보다 보면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정직함처럼 느껴집니다. 연출이 숨을 참는 대신, 현장의 숨소리가 그대로 들어옵니다.
특히 안재홍이 연기하는 코치 강양현의 표정 연기는 인상적입니다. 그는 많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선수들이 실수할 때, 진다는 걸 알면서도 코트로 내보낼 때, 그의 눈빛은 그냥 묵묵합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전합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음악도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잔나비 등이 참여한 OST는 2010년대 초반의 감성을 복고적으로 재현하면서도, 억지로 감정을 끌어올리려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장면일수록 음악이 빠지거나 작아집니다. 영화적 언어로 말하면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안에 담긴 모든 시각적 요소의 배치와 연출)이 감정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침묵 자체가 감정이 됩니다.
저는 코치가 선수들에게 딱히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말 대신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옆에 있다는 것 자체로. 새벽 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핸들을 잡고 있는 것 자체가 오늘을 버티는 방식일 때요. 코치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의 무게
2004년 제가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 저는 서른아홉이었습니다. 주재원이라는 직함은 있었지만, 상하이 도심 한복판에서 저는 그냥 아무도 아니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고, 문화가 낯설고, 회식 자리에서 혼자 웃음의 타이밍을 놓칠 때마다 속으로 조용히 위축됐습니다. 내가 여기서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데, 아무도 내가 애쓰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그 고독함.
영화 속 부산 중앙고 농구부 아이들도 비슷한 이방인이었습니다.
전국대회에 출전한다고 해도 그 어디도 이들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강호들이 즐비한 체육관 안에서 이 아이들은 유니폼부터 다릅니다. 실력도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름'이 결코 부끄러움으로 처리되지 않는다는 게 이 영화의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방인의 감각이 오히려 두려움 없이 뛰게 만드는 역설, 잃을 게 없는 자의 자유로움. 그게 이 팀이 예상을 뒤엎는 방식이었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요. 저 나이에 저 무대에 섰다면,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상하이에서 8년을 보내면서도 끝내 그 도시와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으로 들어가 이방인으로 나왔습니다. 그 시간이 낭비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더 일찍 '다름'을 무기로 삼을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가끔 합니다.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면서 저는 회복탄력성(resilience, 스트레스나 역경으로부터 회복하는 심리적 능력)이라는 개념을 배웠습니다. 리바운드(Rebound)라는 제목 자체가 그 개념의 번역입니다. 농구공이 림을 맞고 다시 튀어 오르듯, 사람도 좌절을 맞고 다시 솟구칠 수 있다는 것. 이 아이들이 그랬습니다.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도복의 끈을 조이는 것, 그것이 리바운드입니다.
주인공이 왜 그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져도 되는 상황에서, 빠져나갈 명분이 충분한데도 왜 계속 코트로 달려갔을까요. 저는 그게 '증명'이 아니라 '존재'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내 스스로에게 확인하기 위해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결국 그런 것입니다.
희생이라는 언어, 그리고 내려놓음
2023년 9월 28일, 저는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뭔가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무릎이 꺾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붙들고 있던 것들, 증명하려 했던 것들, 놓기 싫었던 것들이 그 순간 우수수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내려놓음'이 뭔지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영화에서 코치 강양현은 선수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게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코치라면 당연히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그는 다릅니다. 아이들이 지쳐 쓰러지면 옆에 앉아 있고, 전략을 바꿔야 할 때 자기 고집을 내려놓습니다. 그 모습이 어떤 의미에서는 희생입니다. 지도자의 희생은 용기 있는 돌격이 아니라, 자기 안의 집착을 내려놓는 것에 더 가깝다는 걸 이 영화는 조용히 보여줍니다.
다만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아쉬움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강양현이 왜 실패한 선수 출신임에도 다시 코치로 서야 했는지, 그 심리적 동기와 내면의 상처가 조금 더 정직하게 그려졌다면 더욱 묵직한 작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회복은 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국 한 인간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입니다. 그 지점을 영화가 약간 비껴간 것이 아쉬웠습니다. 선수들의 성장은 충분히 보여줬지만, 코치 자신의 '리바운드'는 조금 덜 보인 느낌이랄까요.
아래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영화의 연출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 핸드헬드 촬영과 비전문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앙상블이 실화의 질감을 살려냅니다. 이는 다큐멘터리 연출 미학에서 자주 논의되는 '픽션과 다큐의 경계 허물기' 기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유머와 감동의 균형: 억지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웃음과 감동을 교차시켜, 관객이 스스로 감정을 쌓아가게 만드는 구성입니다.
저는 지금도 새벽 네 시면 눈이 떠집니다. 수면이 늘 부족하지만 그 고요한 새벽에 이런 영화의 여운이 오히려 더 오래 머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 나이에 버스 핸들 앞에 세우신 데 이유가 있다고 믿듯이, 저 아이들이 체육관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선 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 믿음을 스크린 위에서 증명한 영화였습니다.
《리바운드》는 스포츠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오히려 삶에서 한 번쯤 넘어진 적 있는 분들,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 있는 분들께 더 강하게 와닿을 것입니다. 특별히 자녀와 함께 보기에도 좋습니다. 승패 대신 태도를, 결과 대신 과정을 가르치고 싶을 때요.
감동의 포장을 최소화한 덕에 오히려 더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한국 스포츠 드라마가 이 정도까지 올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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