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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중국에 처음 내려던 날 밤, 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언어도, 사람도, 익숙한 것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버텨내면 달라지겠다'는 생각 하나로 핸들을 잡았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새벽 서울 도로 위에서 핸들을 잡고 있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레이디스 퍼스트》는 장애를 극복한 인도 최초의 여성 패럴림픽 메달리스트 디파 말리크의 실화를 담은 작품입니다.
한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디파 말리크(Deepa Malik)는 척추 종양 수술 이후 하반신 완전 마비 판정을 받습니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완전 척수 손상(Complete Spinal Cord Injury), 즉 손상 부위 이하의 운동·감각 기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완전 척수 손상이란 뇌에서 내려오는 신호가 손상 지점 이하로는 전달되지 않는, 의학이 '회복 불가'라고 선을 긋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화는 그 선고 장면을 굳이 극적으로 연출하지 않습니다. 담담하게 기록할 뿐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무섭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2019년 이후 사기 피해를 당했을 때 비슷한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십 년을 쌓아온 경력과 자산이 한순간 무너졌을 때 주변에서 들은 말들이 있습니다. "이 나이에 뭘 새로 시작해." "이제 그만 쉬어." 그 말들은 선의였지만, 저에게는 '한계 통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쿠팡 새벽 배송 현장에 나갔고, 배달 오토바이에 올라탔고, 결국 버스 핸들을 잡았습니다.
디파도 그 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창던지기, 원반 던지기, 수영으로 훈련을 시작합니다. 의사가 그은 선 바깥으로 스스로 걸어 나간 것입니다. 영화는 그 과정을 비장하게 찍지 않습니다. 감독 투샤르 히라난다니는 디파의 표정에서 '고통'보다 '집중'을 포착합니다. 이 연출 선택이 탁월한 이유는, 고통을 전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녀의 의지가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어땠을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사기 피해 이후 바닥을 치던 시절, 저는 '미리 파악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억지로라도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게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 누군가를 원망하며 멈춰 섰을 겁니다. 한계는 멈추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디파가, 그리고 제가 배운 것은 그것입니다.
무너지는 몸 위에서 의지는 더 크게 자란다
2016년 리우 패럴림픽, 디파 말리크는 포환던지기 F53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합니다. 인도 여성 최초의 패럴림픽 메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메달이 아니라, 그 메달에 도달하기까지 그녀가 통과한 '관계의 저항'입니다.
영화 속에서 디파의 가족, 특히 남편의 시선은 복잡합니다. 응원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카메라에 잡힙니다.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이중 구속(Double Bind), 즉 서로 모순된 메시지를 동시에 받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이중 구속이란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하려는 것은 막고 싶다"는 두 신호가 충돌하는, 당사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심리적 압박을 의미합니다. 사회복지사와 심리상담사 공부를 하면서 저는 이 개념을 배웠는데, 디파의 상황이 교과서보다 훨씬 선명하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의지는 이상하게도 저항이 클수록 더 단단해집니다. 디파가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환경이 나빴기 때문에 오히려 내부에서 불을 지핀 것입니다. 저도 그걸 압니다. 하루 4시간도 못 자면서 버스 운전과 보험 투잡을 이어가는 것, 건강 상태가 썩 좋지 않으면서도 이백 강의 준비를 놓지 않는 것, 그게 가능한 이유는 환경이 허락해서가 아니라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을 몸이 알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왜 가족의 만류에도 경기장으로 나갔을까요? 저는 그것이 '가족에 맞서는 반항'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책임'이었다고 봅니다. 자신의 몸이 아직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는 것, 그게 디파에게는 더 큰 배신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에 관한 연구에서도 같은 맥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경 이후 회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역설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장면은 메달 시상식이 아닙니다. "여자가, 그것도 몸이 그런 여자가"라는 주변의 시선을 정면으로 담아낸 부분입니다. 인도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조건과 장애라는 조건이 겹쳤을 때 사회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카메라는 말하지 않아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핵심 역설이 드러납니다. 디파는 여성이기 때문에 약하다는 시선을 받았고, 장애가 있기 때문에 포기하라는 시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 관객이 보는 것은, 그 두 가지 조건이 오히려 그녀를 인도 역사에 새기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2023년 9월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2024년 세례를 받으면서 '내려놓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내려놓아야 더 많은 것이 채워진다는 것. 디파가 '이길 수 없다'는 시선을 내려놓고 경기장에 섰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저도 60이라는 나이, 고혈압, 허리디스크, 한쪽 귀 난청, 이 모든 것이 '이제 그만'이라고 속삭일 때, 그 속삭임을 내려놓는 연습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새벽 회차 구간 빈 도로를 달릴 때, 그 침묵이 처벌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느끼는 것, 그것이 제가 이 영화에서 다시 확인한 역설입니다.
다큐멘터리의 완성도 면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약 4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디파의 내면보다 외적 성취에 조금 더 기울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가족 안에서 느꼈을 심리적 고립, 딸과 아내라는 역할 사이의 죄책감, 그 내면의 층위가 더 열렸더라면 영화의 밀도는 훨씬 두터워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단순한 스포츠 다큐를 넘어 사회적 발언으로 기능하는 것은, 인도 여성과 장애인을 향한 이중의 편견을 동시에 정면으로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패럴림픽에 관한 더 넓은 맥락은 국제패럴림픽위원회 공식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40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러나 짧다고 가볍지 않습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이제 끝인가' 싶었던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이 40분이 몇 시간처럼 묵직하게 남을 것입니다. 특히 나이나 건강, 환경의 벽 앞에서 멈출지 말지를 고민 중인 분께 권합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이제 끝인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이 40분은 단순한 다큐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용기를 건네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참고 및 출처
미국심리학회(APA) – 회복탄력성 자료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 – 디파 말리크 소개
넷플릭스 《레이디스 퍼스트》 공식 정보
[APA - Building your resilience](https://www.apa.org/topics/resilience))
[International Paralympic Committee](https://www.paralympic.org/deepa-mal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