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레드 노티스] 사기꾼들 사이에서 싹튼 신뢰, 그 아이러니

by 어성초님 2026. 6. 7.

레드 노티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 어드벤처로,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

서울 새벽 거리를 수백 명의 승객과 함께 달리다 보면, 집에 돌아와 뇌를 완전히 비우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날 밤도 그랬습니다. 소파에 몸을 던지고 넷플릭스를 켰을 때 알고리즘이 밀어주던 영화가 바로 《레드 노티스》였습니다.

반전과 케미, 이 영화가 90%의 관객을 사로잡은 이유

《레드 노티스》는 인터폴(INTERPOL, 국제형사경찰기구)의 최고 수배 등급을 뜻하는 '레드 노티스'를 소재로 한 글로벌 액션 코미디입니다. FBI 프로파일러(FBI Profiler, 범죄자의 심리·행동 패턴을 분석해 용의자를 추적하는 전문 수사관)인 존 하틀리는 전설적인 미술품 도둑 놀런 부스를 쫓다가 오히려 누명을 쓰고 레드 노티스 수배자가 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바로 이 설정이 영화 전체를 끌어가는 핵심 동력입니다. 두 사람은 진짜 범인인 비숍을 잡기 위해 손을 잡고, 클레오파트라의 황금 알 세 개를 둘러싼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 세계적으로 공신력 있는 영화 평점 집계 사이트) 기준으로 평론가 점수는 35%에 불과하지만, 관객 점수는 90%에 달합니다. 이 극단적인 간극이 이 영화의 본질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저는 단연 관객 점수 쪽입니다. 평론가들이 말하는 '서사의 깊이 부재'는 이 영화에서 결함이 아니라 의도된 설계입니다.

감독 로슨 마샬 서버는 "세 배우의 케미(Chemistry, 배우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호흡과 매력)가 이 영화의 전부"라고 단언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드웨인 존슨의 절제된 묵직함과 라이언 레이놀즈의 쉴 새 없는 입담이 충돌하는 장면들은 대본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듭니다. 감독은 왜 이렇게 단순한 구조를 선택했을까요? 아마도 지친 현대인이 두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영화가 철학적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루 열 시간 넘게 운전대를 잡은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영화가 따로 있고, 이 영화는 그 역할을 정확히 해냅니다.

제작비 2억 달러(약 2,700억 원)가 투입된 넷플릭스 역대 최대 규모 제작작답게 로케이션(Location, 영화 촬영을 위해 실제로 사용하는 야외 촬영지)만으로도 눈이 호사를 누립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면들은 화면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입니다.

배신의 연속 앞에서, 저는 웃기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단순히 오락으로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2004년부터 7년간 중국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사업 파트너에게 크게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상대가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 식사를 함께하면서도 뒤에서는 전혀 다른 판을 짜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하틀리와 부스가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그래서 저에게는 유독 묘하게 다가왔습니다. 웃기는 설정인데, 어딘가 현실적이었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요? 저 같으면 감옥에서 탈출하는 순간 이미 혼자 튀었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나면, 이익을 위해 손을 잡는다는 선택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배신과 이용이 뒤섞인 관계 속에서도 결국 파트너십을 만들어냅니다. 사기꾼과 형사가,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도 진짜 신뢰에 가까운 무언가를 쌓는다는 설정은 단순한 코미디 장치를 넘어섭니다.

갤 가돗이 연기한 비숍이라는 캐릭터도 흥미롭습니다. 끊임없이 반전을 만들어내는 이 인물은, 영화 속 진짜 사기꾼이면서 동시에 하틀리와 부스가 서로를 더 단단하게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적이 있어야 동지가 생긴다는 구조를 이 영화는 아주 경쾌하게 보여줍니다.

라이언 레이놀즈의 연기 방식은 '애드리브(Ad-lib, 대본에 없는 즉흥 대사나 행동)'처럼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습니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편인 저조차도 그의 타이밍에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드웨인 존슨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받아치는 리액션이 그 웃음을 두 배로 만듭니다. 두 배우의 호흡이 이 정도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 영화는 그냥 평범한 액션물로 끝났을 겁니다.

지친 몸을 소파에 던지는 사람에게 필요한 영화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레드 노티스》는 공개 직후 넷플릭스 90개국에서 동시 1위를 기록했고, 3주 연속 전 세계 1위를 유지했습니다. 단순한 팝콘 무비(Popcorn Movie, 팝콘을 먹으며 편하게 즐기는 오락 영화)가 어떻게 이런 기록을 세웠는지 평론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저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깊이보다 가벼움이 필요합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밤늦게 귀가하는 버스 기사에게, 혹은 하루 종일 스크린을 들여다보며 회의를 소화한 직장인에게, 집에 돌아와 118분 동안 뇌를 완전히 쉬게 해주는 영화는 오히려 사치에 가까운 선물입니다. 감독은 왜 이 영화를 이렇게 가볍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그게 실력 부족이 아니라 정확한 독해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 세계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2억 달러짜리 포장지에 담아낸 것입니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출장에서 봤던 풍경들이 화면 속에 등장할 때마다 잠깐씩 기억이 겹쳤습니다. 거기다 아직 살면서 누명 한 번 안 쓰고 살아온 것에 새삼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감상이 끼어드는 영화도 드뭅니다.

후속 편 2·3편 제작이 확정됐다는 소식도 반갑습니다. 세 배우의 케미를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버스 운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무언가 편하게 보고 싶은 분,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싶은 분께 이 영화를 권합니다. 반전을 즐기는 분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깊이를 찾으러 가면 실망할 수 있지만, 그냥 웃으러 가면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참고: 위키피디아 - 레드 노티스
로튼 토마토 - Red Notice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butterflymo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