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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 후 동료 기사의 한마디가 저를 극장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중국 살다 온 양반이 안 보면 섭섭하지 않겠어요?" 그 말이 없었다면 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극장 문을 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  <너자 2>는 '볼거리 좋은 중국 애니'로 시작해서, 어느 순간 제 지난 삶의 한 장면들을 불러내는 영화가 됐습니다.

    눈빛 하나로 분노와 두려움을 동시에 터뜨린 악동의 연기

    애니메이션이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실사 배우를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쟈오쯔 감독이 노자의 눈빛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화면을 통해서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반항기 가득한 눈꼬리, 그 안에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흘러넘치는 장면들은 말 그대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특히 천계의 위선을 마주하는 순간, 노자의 눈빛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깊은 상처와 배신감이 얹혀 있었습니다. 미간의 떨림과 입술을 앙다무는 작은 몸짓으로 표현된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자기부정의 감정이 그 디테일(세부 표현)만으로도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전달됐습니다.

    오병의 연기톤은 노자와 정반대입니다. 억눌려 자란 용족의 아들답게 표정이 절제되어 있고 움직임도 내향적입니다. 그런데 우정이 깊어지는 장면에서 오병의 눈가가 조금씩 풀리는 과정, 이른바 감정의 해동(解凍)이 섬세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너 자는 앞으로 돌진하고, 오병은 한 발 물러서다 결국 함께 뛰어드는 구도, 이것이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말보다 먼저 설명해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독자분께 하나 여쭤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말없이 나란히 싸워본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큰아들이 중국 로컬 학교에 다니던 첫날을 떠올렸습니다. 중국어 한마디 못하던 아이가 밤에 제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울었습니다. 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냥 어깨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자 아이는 운동장을 중국 아이들과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언어보다 먼저 마음이 통하는 방법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자와 오병이 말없이 나란히 싸우는 장면에서 그 기억이 절로 올라왔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냥 버티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연대(連帶)였다는 것을 압니다.

    천계의 차가운 빛이 감추고 있던 위선을 카메라가 폭로하다

    쟈오쯔 감독은 의대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3D 애니메이션을 배운 사람입니다. 저는 그 이력을 읽으며 한참 멈췄습니다. 정해진 길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개척한 사람, 그 삶 자체가 이미 노자와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카메라 무빙(camera movement, 화면 이동)에는 공식보다 본능이 느껴집니다.

    물·불·번개가 충돌하는 액션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피사체와 함께 달립니다. 흔들리고 회전하며 관객을 전장 한복판에 세웁니다. 그런데 가족의 희생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완전히 멈춥니다. 고요하게, 긴 시간 머뭅니다. 이 정지가 폭풍 같은 액션 사이에서 감정의 낙차를 극대화하는 장치였습니다.

    조명 설계도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계는 지나치게 밝고 차갑습니다. 흰빛과 금빛이 지배하는 그 공간은 아름답지만 냉혹합니다. 반면 노자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에서는 붉은 화염과 어두운 그림자가 뒤섞입니다. 밝음이 곧 선(善) 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조명만으로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예전에는 '화려하고 밝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봤는데, 지금은 달리 봅니다. 가장 밝은 공간이 가장 위험한 공간일 수 있다는 것을 중국에서의 15년이 가르쳐 줬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여쭤볼게요. 당신은 너무 밝아서 오히려 불안했던 공간을 경험해 본 적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중국 공장 초창기, 현지 임원진이 회의실을 환하게 꾸며놓고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웃음도 환했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더 무거웠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밝은 회의실 뒤편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차단되고 있었는지를. 쟈오쯔 감독이 천계를 하얗고 차갑게 설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 화면 구성 전체)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중국 땅에서 손가락질받던 이방인이 노자의 포효에서 찾은 자유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극장 안이 조용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심장 어딘가를 건드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10여 년 전, 사기 피해와 주식 리딩 손실이 한꺼번에 터졌을 때, 저도 속으로 비슷한 말을 삼킨 적이 있었으니까요. '왜 하필 내가, 왜 하필 이 시점에.'

    그 무렵 아내는 1999년 위암 수술을 마친 몸으로 곁에 있었고, 두 아들은 막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은 쿠팡 배달 오토바이였습니다. 새벽마다 헬멧을 눌러쓰고 아파트 단지를 누볐습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박스를 받아가는 그 짧은 순간이, 제가 아직 쓸모 있다는 확인이었습니다. 너 자가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장면이 그래서 저에게는 단순한 액션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노자의 노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보여주는 희생은 카타르시스(catharsis, 정서적 해방감)의 정점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라는 역할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했습니다. 중국에서 주재원으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실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아이들이 상처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어깨에 손을 얹는 것뿐일 때의 그 무력감, 노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것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여쭤봅니다. 당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라고 느꼈던 순간을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저는 그 순간을 오토바이 핸들을 잡으면서 통과했습니다. 지금은 버스 운전대를 잡으면서 통과하고 있고, 새벽 헬스장에서 턱걸이를 하면서 통과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생기고 나서는 금연도 시작했습니다. 너 자가 운명이라는 족쇄를 불태워버리듯, 저도 한 가지씩 태우고 있는 중입니다. 이 영화가 60대 초반 버스 기사에게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이 작품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너자 2》는 흠이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중반부 천계 설명 장면에서 서사가 다소 늘어지는 느낌이 있었고, 처음 시리즈를 보지 않은 관객에게는 인물 관계가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130분이 넘는 러닝타임은 피곤한 몸으로 들어간 저에게는 후반부에 조금 벅찼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볼 만합니다. 아니,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 번쯤 '내가 왜 여기 있나'는 생각을 해본 사람에게, 타지에서 외롭게 버텨본 사람에게,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날을 기억하는 부모에게 추천합니다. 스펙터클(spectacle, 압도적 시각 경험)은 덤으로 따라옵니다.

    참고 및 출처